“무연고사 남의 일 아냐”…공영장례식장서 본 ‘빈곤의 풍경’

송윤경·이혜리 기자 2024. 11. 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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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자 공영장례에서 고인의 이름이 쓰인 지방을 태우고 있다. 나눔과나눔 제공

[주간경향] 지난 10월 9일 44세의 남성 이원호씨(가명)가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죽음을 알린 건 ‘냄새’였다. 고시원을 관리하는 A씨가 이씨의 방에서 부패한 냄새가 나자 마스터키로 문을 열어 시신을 확인했다.

“TV가 켜져 있고, 화장실 불도 켜져 있어서 들어가 보니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어요. 지난달 말에 고시원비를 내지 않아서 전화해봤더니 ‘병원에 있다’고, 곧 내겠다고 했거든요. 그 후론 마주친 적이 없었죠. 죽은 지 며칠은 된 것 같았어요.”

이원호씨가 이 고시원으로 들어온 것은 약 8개월 전. 고시원의 다른 입주자들과 교류도 많지 않아 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이는 없었다.

관리인 A씨는 지난 10월 21일 기자와 통화에서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고시원에서 4년째 일하는데 사람이 죽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입실할 때 눈여겨보긴 하는데,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딴 데 가라’ 할 수도 없지요.”

시신 발견 8일 후 이원호씨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 보건복지부의 장사정보서비스 포털 ‘e-하늘장사’에 올라왔다.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장제 사무를 처리하고 다음과 같이 공고하오니, 연고자는 유골을 인수하시기 바랍니다.” 이씨가 공영장례로 화장된 뒤 광주광역시의 영락공원에 봉안됐다는 내용이었다.

결혼과 혈연 등으로 맺어진 법적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들이 장례를 포기한 ‘무연고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장종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는 5415명. 3년 전(2020년 3136명)보다 72.7% 늘었다.

‘한 해 무연고 사망자 5000명’은 병든 한국사회를 드러내는 지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4700만원. 국내총생산(GDP·1조6733달러)은 세계 13위를 기록했다. 경제 성장은 가팔랐으나 IMF 외환위기(1997년), 글로벌 금융위기(2007~2008년), 코로나19 등의 위기 때마다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 ‘정상의 삶’으로부터 밀려나야 했다. 실업과 질병, 가족불화와 해체, 빈곤의 대물림이 반복된 결과가 ‘무연고사의 급증’이다.

인천의 부귀후원회 관계자들이 무연고자 공영장례를 진행하고 있다. 이혜리 기자

늘어나는 무연고 사망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이 사회의 실패라면, 이들에게도 사회적 애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약 95%의 지자체가 공영장례 조례를 만들어 예산을 편성하고 무연고자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모든 ‘산 자’들을 대신해 이들의 공영장례에 참여하고 무연고자와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 2011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장례를 위해 결성된 뒤 무연고자 장례 모델을 만들어 확산시켜 온 ‘나눔과나눔’은 서울시의 모든 공영장례를 장례의전 업체와 함께 진행하고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부산시에서 공영장례 조례 운동을 펼쳤던 ‘부산반빈곤센터’는 조례 제정 뒤 부산 시민들로 구성된 조문단을 만들어 조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장례지도사들로 구성된 인천시의 ‘부귀후원회’는 공영장례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업체들을 비판하며 무연고 사망자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이 공영장례 현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풍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신을 무연고자 공영장례식으로 초대한다.

■“배웅해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고 박남주(가명)의 장례를 진행하겠습니다. 운명하기 전 미추홀구에 신고되어 있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주거지인 자택에서 홀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였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족들은 오랜 단절이나 장례식의 경제적 부담으로 인하여 미추홀구청에 시신을 위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난 10월 26일 오전 10시 40분 인천시립 장사시설인 인천가족공원의 별빛당 1층 ‘인천시립 공영장례실’. 기자를 포함한 성인 5명이 고 박남주씨의 위패 앞에 섰다. 백합과 흰 장미로 꾸며진 제단 앞엔 고사리와 도라지나물, 북엇국 등의 음식과 배, 대추, 사과, 곶감, 약과가 놓였다. 장례지도사들의 모임 ‘부귀후원회’가 진행하는 인천시의 공영장례였다. 고인이 다음 생에서는 부귀하게 태어나길 바란다는 뜻을 담아서 ‘부귀후원회’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가기환 부귀후원회 대표가 고인의 사망진단서 등에 담긴 최소한의 정보를 토대로 고인을 소개한 데 이어 상주를 맡은 또 다른 봉사자가 술 한잔을 올리고 음식에 수저를 꽂았다. ‘마지막 식사’를 올린다는 의미였다. 기자도 술 한잔을 올렸다. 가 대표가 이어 조사를 읽어내려갔다.

“외롭고 힘들었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이제 영원히 가시는 길이 아쉬워 이렇게 술 한잔 올려드렸습니다. (중략) 늦게나마 위로해드리려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였습니다. 배웅해드릴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부디 먼 길 편히 가십시오.”

가 대표와 봉사자들은 화장장으로 이동했다. 고인을 모신 관을 화장로로 옮기는 운구 절차가 이어졌다. 화장로마다 유족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선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엄마~” 고인을 부르짖는 소리가 화장장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박남주씨의 관이 옮겨진 화장로만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사람들, 가족이 버린 거 아닌가요?” 문득 공영장례 빈소로 오는 동안 택시 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인천 부귀후원회 관계자들이 무연고자의 시신이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혜리 기자

다수의 무연고 사망자에게 가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의 무연고 사망자(2만609명) 10명 중 7명(73.1%·1만5069명)은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피해 무연고자로 분류됐다. 시신 인수 거부·기피는 장례를 포기했다는 의미다.

이유를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파고든 빈곤 현실을 만나게 된다. 무연고자 유족들의 시신위임 사유를 분석해온 나눔과나눔 박진옥 이사는 말한다. “위임서상의 사유를 보면 대개 가족관계 단절과 경제적 사정 두 가지로 나뉘어요. 그런데 유족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면 단절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큽니다. 많은 사람이 장례엔 돈이 안 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15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장례비용은 약 1300만원이다. 빈소를 차리지 않고 시신 안치·입관·염습·운구·화장만 한다 해도 대략 300만원은 필요하다. 고인이 오래 투병해 밀린 병원비까지 있다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에선 엄두 내기가 쉽지 않다.

이날 장례를 진행한 가 대표 역시 ‘장례빈곤’을 목격하고 장례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큰 상조회사에서 일하면서 돈이 없어 발인을 못 해 발을 동동 구르는 걸 자주 봤어요.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죠. 남편이 대학병원에서 두 번 수술했는데 실패했대요. 그런데 의사가 한 번만 더 수술하면 살 수 있다고 해서, 아내가 집을 팔았다고 해요. 아들 둘이 있는데 장애인이고요. 병원비랑 시신 처리비용이 1000만원이 넘게 나왔어요. 장례지도사들끼리 돈을 모으고, 장례업체와 흥정을 해서 겨우 고인을 모셨죠.”

■“제가 형의 시신을 포기했습니다”

공영장례를 치르는 이들은 때로 장례 현장에서 유족을 만난다. 아직 공영장례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대개는 “화장하는 것이라도 보려고” 화장장을 찾은 가족들이다.

3년 전, 서울에 살던 60대 초반 남성의 공영장례가 치러졌을 때다. 자신을 고인의 막냇동생이라고 밝힌 이가 장례에 찾아와 서럽게 울며 말했다고 한다. “제가 형의 시신을 포기하고 왔습니다.” 그가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에게 전한 사연은 이랬다. 막내가 열한 살 때 어머니를 잃은 네 형제는 일찍부터 경제활동을 하며 각자 살았다. 막냇동생은 시각장애인인 아버지와 함께 지냈고 운수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큰형이 사망했을 때 둘의 장례는 막냇동생이 치렀다. 그러나 둘째 형이 세상을 떴을 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코로나19로 일감이 없어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사망자의 연고자가 장례를 포기하고 시신처리를 지자체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위임서. 이유란에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쓰여 있다. 시신 위임 현황과 이유 등을 분석해 온 나눔과나눔 박진옥 이사는 “장례를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빈곤”이라면서 “장례는 돈이 안 든다는 것은 실제와 다르다. 빈곤층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의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눔과나눔 제공

활동가들이 접하는 무연고 사망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다. 유족들 사연의 공통점을 묻자 나눔과나눔의 김민석 사무국장이 답했다. “한국사회가 IMF를 잘 겪어냈다고 자부하잖아요. 저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이런 이야기를 많이 접해요. IMF 때 실직해 무너졌다가 재기해보려 했지만 잘 안돼서 술에 의존하고, 가족과 멀어지게 되고, 고시원이나 쪽방, 여관에서 홀로 생활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요. 코로나19의 영향도 앞으로 10~20년은 모니터링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IMF와 무연고 사망 간 관계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2015년에는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가운데 50대(386명·29.6%)가 가장 많았는데 지난해에는 60대(431명·35%)가 가장 많았다(나눔과나눔 ‘나이로 본 무연고 사망자 통계’). 무연고 사망이 가장 많은 연령대가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진옥 이사는 “IMF 때 30~40대였던 이들이 가장 많이 무연고 사망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거 아니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이제까지 확인한 IMF의 충격은 일부였고, 수면 아래에 있던 빙산이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무연고자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모임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무연고자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모임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예원 팀장, 김민석 사무국장, 박진옥 상임이사 / 서성일 선임기자

■공영장례가 돈벌이?

무연고 사망자는 장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가. 2010년대에 나눔과나눔이 공영장례 운동을 하며 사회에 던진 질문이었다. 이들의 질문에 많은 지자체가 ‘응답’했다. 2018년 서울시가 광역지자체 최초로 공영장례 조례를 만든 후 지금은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가 공영장례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인식 변화가 느리면 제도는 겉돌기도 한다. 지자체 지원금이 나오는 무연고 장례를 돈벌이로 활용하는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가기환 부귀후원회 대표는 조례 제정 뒤 장례업체와 갈등을 겪은 얘기를 들려줬다. “예전에 조례도 없고 예산도 없었을 때는 저희가 장례식장을 쫓아다니면서 부탁했어요. 무연고 사망자들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저희가 장례를 치르겠다고요. 몇몇 장례식장은 ‘그래 봉사한다는데 도와줄게’ 했죠. 하지만 조례가 생기고 나서 장례식장들이 등을 돌렸어요. 자기들이 직접 하면 지원금이 나오니까요.”

무연고 사망자를 ‘돈’으로 보는 업자들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리 없었다. 모형음식을 올려 상을 차리거나, 장례가 끝난 빈소에 들어가 위패만 갈아 끼워 구청 제출용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다. 가 대표는 “장례식장과 갈등이 깊어지니까 실망하고 돌아간 봉사자들도 있었다”면서 “우리는 제물상과 제단을 다른 장례와 똑같이 마련하려 노력하고, 5시간에 걸쳐 유골 봉안까지 직접 마치지만 ‘쓸데없는 짓’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업체도 많다. 공영장례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자가 참석한 지난 10월 26일의 공영장례 현장에서도 타 업체가 받아 가지 않은 유골함을 부귀후원회 봉사자들이 대신 봉안했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장례지도사 실습용’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부산반빈곤센터를 통해 공영장례 조문 운동을 하는 맹정은씨는 지난 8월 찾은 장례 현장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장례가 진행 중인 것 같은데, 학생들한테 ‘상 놔 봐, 젓가락 놔 봐, 어디에다가 놔야 해, 거기 놓으면 옛말에 XX라고 했어, 너 이거 어디에 놓는지 몰라?’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더라고요. 공영장례 현장에서 예비 장례지도사 교육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고인에 대한 예의를 이렇게 갖추지 않아도 되나요.” 학생들을 가르치던 장례지도사는 조문단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사망자가) 치료비가 많이 나와서 유족이 (장례를) 포기했어요. 이분들 사실 못 와요.”

부산반빈곤센터의 ‘부산시민 공영장례 조문단 양성과정’을 수료한 시민들 / 부산반빈곤센터 제공

■시민들의 조문 운동

돈벌이 수단으로 치부되는 일부 공영장례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공영장례를 장례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산반빈곤센터는 시민들의 ‘사회적 애도’에서 그 답을 찾았다. 지난해 5월부터 부산시민 공영장례 조문단을 꾸려 공영장례 조문 운동을 벌이는 이유다. 임기헌 활동가는 “올해의 경우 신청자 대다수가 기존 회원이나 인권 활동가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었다. ‘우리만 관심 있는 게 아니구나’ 싶어 놀랐다”고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이민영씨는 “인간이 태어나면 환대를 위한 각종 복지제도가 있는데, 반대로 죽음과 관련해선 왜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던 차에 공영장례를 알게 됐다”면서 “알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우리 사회 공동체를 함께 살다간 분이니까 나의 이웃에게 인사드린다는 마음으로 조문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 큰아들의 생일에 무연고자 빈소를 함께 찾기도 했다. “와보니까 어떠냐고 물으니 아들이 ‘아무도 없어서 너무 안타까워’라고 하더라고요. 아들에게 이렇게 말 해줬어요. ‘(고인은) 우리가 원래 알던 분은 아니지만 우리랑 상관없는 분이 아니야. 우리와 함께 살다간 분이야. 앞으로 이렇게 홀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아질 텐데, 우리가 이런 분들을 잘 보내드릴 수 있도록,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야’라고요.”

반빈곤센터는 고인을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 가까웠던 지인을 수소문해 공영장례에 초대하기도 했다. “매달 찾아뵈면서 신뢰감이 쌓여서일까. 고인은 조금씩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 사회운동하는 학생을 숨겨주었다가 고문당한 이야기, 그러면서 이혼을 하게 됐고 2명의 자녀와 연락이 끊긴 이야기…. 저에게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본인 상황은 우울하지만 남 탓을 하지 않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호스피스 센터 간호사가 자신이 돌보던 노인의 공영장례에 참석해 발표했던 글 일부다. 서울의 나눔과나눔 역시 사망자가 오래 머물던 고시원, 요양병원에 전화하거나, 직접 방문해 친밀한 지인들이 공영장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공영장례 조문단으로 활동하는 이민영씨가 무연고자 공영장례 제물상에 올린 추모 엽서 / 반빈곤센터 제공

■애도의 권리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장례 치를 돈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공영장례는 ‘누구나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권리’ 측면에서 보자면 고인을 위한 것이지만 활동가들은 그것만큼이나 고인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의 ‘애도할 권리’를 강조한다. 내 가족이, 혹은 가깝게 지낸 지인이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돼 증발하듯 사라져버린다면 느끼게 될 심리적 충격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빈소 없이 화장되던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공영장례가 애도의 공간으로 자리 잡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공영장례식이 치러져도 시신을 포기한 가족들은 죄책감과 낙인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친밀했던 지인들은 ‘법적 연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장례 일정조차 알기 어렵다.

박진옥 이사는 “한 해 5000명의 무연고 사망자에게 가족이 4명씩만 있다고 쳐도 2만명이고, 거기에 친밀했던 지인들까지 합하면 매해 수만명이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박탈된 애도’를 경험하고 있다”면서 “애도의 박탈을 막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최소한의 장례 절차를 보장하는 보편적인 장례복지 제도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생전 친밀했던 이들이 장례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고인이 장례에 대한 유언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법적 보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공영장례는 우리에게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유나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는 “무연고자 장례는 빈소 없이 대충 치러도 된다는 생각엔 빈곤과 질병, 성 정체성, 관계 단절 등으로 차별받고 배제됐던 이들의 죽음은 ‘충분히 애도할 만하지 않다’는 평가가 들어 있는 것”이라면서 “장례와 애도 과정에서의 차별을 해소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일”이라고 말했다.

“저는 공영장례 조문을 다녀오면 사회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공영장례에 오는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걸로도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공영장례 조문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 이민영씨의 말이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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