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따오기·고양이…수공예품들에 깃든 ‘귀환’의 꿈

한겨레 2024. 11. 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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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구정은의 현실 지구
난민 글로벌 콤팩트
요르단 왕비, ‘사회적 책임’ 강조
자립 돕는 민-관 협력모델 주목
난민·수용국·유럽 모두에 유리
뿌리뽑힌 이들의 ‘복귀’ 환경 절실
지난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난민기구(UNHCR) 집행위원회 연례회의장에 마련된 난민 수공예품 판매 부스에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메이드(MADE)51 누리집 갈무리

‘MADE(메이드)51’이라는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면 예쁜 공예품들이 올라와 있다. 곧 다가올 연말을 앞두고 내놓은 ‘홀리데이 컬렉션’ 가운데 ‘시리아 트리오’를 골라본다. 5만4천원짜리 세트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다. ‘활기찬 나비’라는 이름의 자수 제품, 실을 엮어 만든 ‘용감한 따오기’와 ‘기발한 고양이’. ‘하모니 트리오’ 세트는 금속으로 된 별에 매듭을 단 ‘별똥별’, 직물 공예품인 ‘노래하는 예쁜 새’, ‘빛나는 고리들’이라는 장신구로 구성돼 있다.

메이드51이 여느 쇼핑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엔난민기구(UNHCR) 누리집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메이드51이란 명칭은 ‘Market Access, Design and Empowerment’(시장 접근, 디자인, 권한 부여)라는 단어들의 머리글자와 유엔난민협약이 채택된 1951년의 숫자를 조합해 만들어졌다. 여기서 파는 물건들은 모두 난민이 제작했다. ‘활기찬 나비’는 레바논에 사는 시리아 난민이, ‘용감한 따오기’는 튀르키예(터키)에 체류하는 시리아 난민 여성들이 만들었다. ‘기발한 고양이’는 아르메니아에 있는 시리아 난민의 솜씨다. 하모니 트리오의 별똥별은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사는 말리 난민이, ‘노래하는 예쁜 새’는 타이(태국)에 있는 미얀마 카렌족 난민이, ‘빛나는 고리들’은 인도로 쫓겨난 미얀마 로힝야족 여성들이 만들었다.

시리아 난민 사태에 깜짝 놀란 유럽

메이드51은 ‘난민에 관한 글로벌 콤팩트’라는 협약(2018)을 바탕으로 출범했다. “세계 최초로 난민들의 생산품을 위한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다. 현재 지구촌에는 5년 이상 ‘장기 난민 상태’(PRS)에 있는 이들이 1600만명에 이른다. 그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글로벌 콤팩트다.

출발점은 시리아 난민들이 가장 많이 간 나라 중의 하나인 요르단이었다. 현재 요르단에는 약 130만명의 시리아인이 거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약 67만명이 난민으로 등록돼 있다. 요르단 정부의 방침은 처음엔 ‘격리’였다. 난민들이 분란을 일으킬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판칠까 걱정해서다. 난민의 노동도 금지했다. 하지만 난민 체류는 점점 길어졌고 국제사회의 지원도 모자랐다. 그러다 2015년 이른바 ‘유럽 난민 사태’가 일어났다.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뒤늦게 난민 유입에 직면한 유럽은 깜짝 놀랐다. 독일이 나서서 난민을 받자고 했다가 거센 역풍에 부딪쳤다.

유럽이 빗장을 걸어 잠그려면 난민들이 시리아 주변에 머물다가 귀환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가 2015년 9월 요르단을 찾아가 난민들이 먹고살게 도와줄 방안을 논의했다. 이듬해 1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가 “수익 몇푼을 담요를 사서 보내는 데에 쓰는 게 아니라 난민을 글로벌 공급망에 통합해 활용하는 것이 난민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연설을 했다. 그래서 요르단 콤팩트라는 협약이 탄생했다. 유럽 국가들이 20억달러를 요르단에 지원하는 대가로 요르단은 시리아 난민들에게 취업 허가를 내준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세계은행은 대출 형태로 금융지원을 해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연합이 난민들을 고용한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세금을 낮춰주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국가들과 국제기구와 기업들이 손을 잡는 민-관 협력 모델이 만들어졌다.

이는 요르단과 유럽 양쪽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중동에서 드물게 안정된 작은 왕국 요르단은 북쪽의 시리아, 동쪽의 이라크, 서쪽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시끄러운 이웃들을 두고 있다. 늘 고래 싸움에 등 터질까 조심하며 줄타기 외교를 하고 난민들을 껴안으며 살아가야 한다. 유럽 시장을 상대로 제조업을 키우고 싶어 하는 요르단에는 난민들이 저임금 노동력 풀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의 양허관세 혜택까지 받으면 더 유리해진다.

유럽은 난민들이 시리아 주변에서 살길을 찾을 수 있게 되니 좋다. 내전이 끝난 뒤 귀환과 재건을 위해서도 난민들이 이웃 나라에 머물면서 경제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 낫다. 난민들이 자립을 하면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 부담도 줄어든다. 요르단 협약에 관여한 영국의 난민 전문가 알렉산더 베츠와 개발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순전히 인도주의적인 접근 방식에서 일자리와 교육을 핵심으로 하는 ‘개발’ 접근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요르단 협약은 유엔 차원의 난민 협약으로 확대됐다. 2016년 9월 유엔 총회 때 난민 정상회의가 열렸고 2년 뒤 글로벌 콤팩트가 성사됐다.

뿌리 뽑힌 이들의 절박함

난민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공예품들. 메이드(MADE)51 누리집 갈무리

계획은 원대했는데 결과는 어땠을까. 요르단 정부와 유럽연합과 세계은행 모두 약속을 지켰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취업 허가를 받은 난민은 9만명에 이르렀지만 그들 앞에 놓인 일자리 선택지는 주로 의류공장이었고, 여성 노동자 수요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난민 여성들이 경제특구에 일하러 가는 게 현실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았다.

난민 글로벌 콤팩트는 시장과 연결해 난민들의 자립을 돕는 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다. 난민들을 ‘피해자’ 혹은 ‘위험 요인’으로만 보는 시각을 넘어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동반자로 보게 해준 것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뿌리 뽑힌 이들이 다시 삶의 경로를 찾는 과정은 협약으로만 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난달 7일 아이만 사파디 요르단 외교장관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찾아가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에게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요지는 빨리 난민들을 돌려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파디 장관은 2주 뒤 다시 다마스쿠스를 방문했고, 아사드 대통령으로부터 “난민들을 귀환시킬 법적 환경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내전 기간 자국민을 학살한 아사드 대통령은 “난민의 안전한 귀환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했지만, 귀환 협상이 본격화하자 요르단에 있는 시리아 난민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한다.

몇년 새 세계에는 고통받는 난민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대거 피란을 떠났고, 이미 난민이었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죽어나간다. 전쟁이 전쟁을 덮고, 참상이 참상을 가린다. 새로운 고통은 오래된 고통에서 세상이 눈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점점 잊혀가는 시리아 난민들은 지금도 분투 중이다. 그들이 활기찬 나비처럼, 용감한 따오기처럼, 기발한 고양이처럼 세상에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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