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주 뉴욕 브롱스의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2024 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뉴욕 양키스가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에게 5-7로 패해 시리즈 전적 1승4패로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내준 뒤 뉴욕의 대표적인 언론 ‘뉴욕 포스트’가 남긴 신랄한 비판이다.
뉴욕 포스트의 비판대로 양키스의 2009년 이후 15년 만에 맞이한 월드시리즈는 애런 저지의 결정적인 실책 하나가 시리즈 전체를 그르쳤다.
신장 2m1, 체중 128kg의 거구인 저지는 그간 거구의 외야수들이 빼어난 타격 능력에 비해 수비력이 떨어졌던 것과는 달리 데뷔 때부터 흠잡을 데 없는 수비를 펼쳐왔다. 데뷔 초반엔 주로 우익수로 나섰던 저지는 거대한 신체로 다이빙 캐치도 잘 해냈고, 빼어난 어깨로 100마일의 레이저빔을 던져 홈으로 쇄도하는 주자들을 잡아내기도 했다. UZR(ultimate zone rating, 팀 실점에 기여한 정도)은 풀타임 첫해인 2017시즌에 6.1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018시즌 8.4, 2019시즌 12.7 등 매우 높았다. 2020년대 들어 한 자릿수로 떨어졌지만, 중견수를 소화하기 시작한 올해도 0.2로 양수를 보였다. 데뷔 초반에 비해 수비 범위가 급격히 좁아진 모습이지만, 자기 앞에 오는 타구를 못 잡는 정도는 아니었다.
저지는 월드시리즈는 물론 디비전 시리즈부터 내내 침묵했다. 월드시리즈 1~4차전 성적은 타율 0.133(15타수 2안타) 0홈런 1득점 1타점에 불과했다. 선구안이 무너져 삼진만 7개를 당했다. 홈런은 고사하고 2루타 이상의 장타도 없다. 월드시리즈 4차전까지 포함해 포스트시즌 전체 성적은 타율 0.152(46타수 7안타) 2홈런 7타점 7득점에 불과했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홈런 2개를 때려내며 월드시리즈에서는 타격감이 살아나겠지 싶었지만, 다시 죽을 쒔다.
그랬던 저지의 방망이가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드디어 폭발했다. 5차전 1회 1사에서 후안 소토가 다저스 선발 잭 플래허티로부터 볼넷을 얻어내 출루했고, 저지가 타석에 들어섰다. 시리즈 내내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온 공에도 헛스윙하거나 정타를 못 만들어내기 일쑤였던 저지를 상대로 플래허티는 초구로 93.7마일(약 150.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한 가운데로 넣었다. 그 순간 저지의 방망이가 번쩍했다. 발사각도 28도로 제대로 밀어친 타구는 우중간으로 약 123m를 날아가 양키스타디움 펜스를 훌쩍 넘어갔다. 선제 투런포. 양키스가 그토록 기다리던 저지의 홈런포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당황한 플래허티는 이어 타석에 등장한 재즈 치좀 주니어에게도 가운데 낮은 포심패트스볼을 통타당해 우측 펜스를 넘어가는 백투백 홈런을 얻어맞았다. 양키스는 1회 3-0으로 앞서나가며 기선을 제압했고, 2회 알렉스 버두고의 적시타로 플래허티를 마운드에서 쫓아냈다. 3회엔 세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선 라이은 브레이저를 상대로 지안카를로 스탠튼이 월드시리즈 2호이자 포스트시즌 7호째 홈런(솔로)을 때려내며 5-0까지 달아났다.
역대 월드시리즈에서 1,2,3차전을 한 팀이 독식한 경우는 24번이 나왔다. 그중 87.5%에 해당하는 21번은 그 팀이 4차전까지 내리 이기는 ‘스윕’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나머지 세 차례는 4승1패로 월드시리즈가 끝났다. 1~3차전을 패한 팀 중에는 어느팀도 리버스스윕은커녕 6차전까지도 시리즈를 끌고간 팀이 없었다. 3회까지만 해도 양키스는 역대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1~3차전을 내주고도 시리즈를 6차전으로 끌고가는 첫 팀이 되는 줄 알았다. 저지의 수비 실책이 나오기 전만 해도.
이날 양키스 선발 개릿 콜은 4회까지 무실점으로 역투하며 타선의 폭발에 보조를 잘 맞췄다.
그러나 악몽은 5회에 시작됐다. 콜이 다저스 선두타자인 키케 에르난데스에게 우전 안타를 맞았다. 이어 등장한 토미 에드먼은 중견수 방면으로 타구를 날렸다. 라인 드라이브성이긴 했지만, 교타자인 에드먼을 맞아 수비 위치를 당겼던 저지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그러나 포구 순간 저지의 시선은 1루 주자 키케를 향했고, 에드먼의 타구는 저지의 글러브에 맞고 그라운드로 떨어졌다. 올 시즌 118경기를 외야수(중견수 105경기, 우익수 8경기, 좌익수 5경기)를 소화하면서 수비 범위는 떨어졌어도 실책은 단 1개도 없었던 저지였지만, 시즌 첫 실책이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것이다.
콜은 흔들릴 법 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윌 스미스를 유격수 땅볼로 유도했으나 유격수 앤서니 볼피가 3루로 뛰던 키케를 잡기 위해 3루로 송구했으나 그 송구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해 올 세이프가 됐다.
무사 만루에도 콜은 흔들리지 않았다. 개빈 럭스와 오타니 쇼헤이를 연속 삼진으로 처리했다. 저지가 에드먼의 타구만 잘 처리했어도 이미 5회는 끝났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2사 만루 상황은 계속 됐다.
이어 등장한 베츠의 타구는 빗맞아 힘없이 1루로 굴러갔다. 베츠는 전력을 다해 1루로 뛰었다. 그러나 콜은 뭐에 홀렸는지 1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지 않았고, 1루수 앤서니 리조가 직접 베이스를 터치하기엔 이미 늦었다. 기록은 베츠의 안타였지만, 명백한 콜의 실책성 플레이였다. 5-1이 됐고, 이어 프레디 프리먼의 2타점 중전 적시타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의 중견수 방면 큼지막한 2타점 2루타가 터져나오며 순식간에 5-5 동점이 됐다.
결국 경기는 1점 승부로 흘렀고, 양키스가 6회 1사 1,3루에서 스탠튼의 희생플라이로 6-5로 먼저 앞서나갔다. 콜은 7회 2사까지 던지며 에이스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문제는 양키스의 불펜이 너무나 얇았다는 것. 마무리 루크 위버를 제외하면 믿을 만한 불펜 요원이 없었다. 양키스의 애런 분 감독은 7회 2사에서 콜에 이어 클레이 홈즈를 올려 점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8회 마운드에 올린 것은 그나마 위버와 더불어 양키스 불펜에서 믿을 만한 투수였던 홈즈가 아닌 토미 케인리였다. 케인리는 올라오자마자 키케와 에드먼에게 연속 안타를 쳐맞고 윌 스미스에게 볼넷까지 내줬다. 그제서야 분 감독은 루크 위버를 올렸다. 분 감독 입장에선 위버에게 2이닝을 맡겼다는 6,7차전에서 영향이 있을 것이라 보고 어떻게든 1이닝만 맡기기 위한 운영을 했지만, 지면 탈락하는 상황에서 어정쩡한 투수에게 8회를 맡긴 것은 대실수였다.
마운드에 오른 위버는 럭스와 베츠에게 희생플라이를 맞고 6-7 역전을 허용했다. 적시타 하나 없이 실점을 최소화한 것이다.
양키스 불펜과 달리 다저스 불펜은 견고했다. 가을만 되면 불펜 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지만, 월드시리즈는 처음인 분 감독보다는 훨씬 더 빼어났다. 6회 2사에 마운드에 오른 블레이크 트라이넨이 8회말까지 2.1이닝을 책임졌고, 9회엔 ‘왕년의 에이스’인 워커 뷸러가 마무리 알바에 나섰다. 토미 존 서저리 후 구속은 떨어지지 않았으나 회전수가 급격히 떨어졌던 뷸러지만, 이날은 달랐다.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과 싱커, 너클 커브가 돋보였다. 특히 결정구 너클 커브의 각도는 너무나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선두 타자 볼피를 77.6마일짜리 너클 커브로 3루 땅볼로 처리한 뒤 오스틴 웰스는 풀카운트 끝에 77.4마일짜리 너클 커브로 헛스윙 삼진으로 솎아냈다. 마지막 타자 버두고도 너클 커브로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2020년 이후 4년만에 다저스의 통산 8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다.
저지는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한 2022시즌(타율 0. 311 62홈런 131타점)보다 2024시즌의 타격 스탯(타율 0.322 58홈런 144타점)이 더욱 뛰어났다. 타율은 커리어 하이였고, 홈런과 타점, 출루율(0.458), 장타율(0.701), OPS(1.159) 모두 아메리칸리그를 넘어 메이저리그 전체 1위였다. wRC+(Weighted Runs Created, 조정 득점 창출력)은 2022시즌이 206, 2014시즌은 2018이었다. 50홈런-50클럽을 달성한 오타니조차 올 시즌 wRC+가 181이었다. 그만큼 2024 시즌 저지가 보여준 타격은 그 어떤 선수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어나더 레벨’이었다.
그러나 수비 하나로 저지의 2024시즌은 망쳤다. 훗날 저지의 2024시즌은 어떻게 기억될까. 역대급 타격 성적을 낸 시즌일까. 월드시리즈를 망친 수비일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