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동 탈취범 안전지대” 미 의회서도 질타 쏟아졌다

황건강 2024. 11. 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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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인권 침해
존 시치가 지난해 4 월 경기남부경찰청 앞에서 아이들을 돌려 달라며 ‘러닝머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또다시 아내 집에 가면 체포할 겁니다.”

지난 1월 19일 부산의 한 경찰서. 한국인 형사의 말에 미국인 마이크 팰론(50)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난해 8월 그의 아내 이모씨가 아들을 일방적으로 탈취해 사라진 뒤 미국 법원으로부터 아동 반환과 양육권 결정을 받아 한국에 온 그였다. 한국 법원도 그에게 면접교섭을 허가했다.

하지만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내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자 아내는 경찰에 신고했다. 법원 결정이 담긴 서류는 쓸모가 없었다. 경찰은 그를 경찰서로 데려갔고, 미국대사관에 연락한 뒤에야 그는 경찰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 국무부, 3년째 한국 ‘아동 탈취국’ 지정
법원의 시계는 느렸다. 아동 탈취 방지를 위한 국제 협약인 ‘헤이그 국제 아동 탈취 협약’은 각국 법원이 반환 청구 접수 후 6주 이내에 결정을 내리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법원은 지난 5월 팰론의 반환 청구가 접수된 지 반년이 지나서야 아들의 반환을 결정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팰론이 법원 결정을 가집행하려고 했을 때는 아내가 이미 이사를 간 뒤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법원 집행관이나 경찰에 적극적인 개입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아들을 탈취당한 지 14개월이 지났지만 팰론은 여전히 아들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소극적인 대처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며 고개를 떨궜다.

탈취당한 아이를 찾아 한국에 건너온 외국인들 사연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인 아내에게 빼앗긴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강남역 앞을 달리던 ‘러닝머신 아빠’ 존 시치는 4년 6개월만인 지난 4월에서야 아이들을 되찾았다. 반면 ‘시애틀에서 온 아빠’로 알려진 치과의사 제이 성은 아직도 아들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다. 2019년 미 연방수사국(FBI)은 성씨 아내를 아동납치죄로 기소했고 한국 법원도 성씨의 양육권을 인정했지만 성씨 아내는 과태료 처분을 받고도 아이를 돌려주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 의회에서도 “한국은 아동 탈취범의 안전지대”라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9월 열린 미 하원 청문회에서 크리스 스미스 미 하원 인권위원회 의장은 한국의 아동 인권 침해 사례를 거론하며 “경제 제재를 가해서라도 한국이 헤이그 협약을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은 이미 미 국무부로부터 3년 연속 헤이그 협약 미이행 국가로 지정된 상태다. 이 명단에 오른 16개국 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한국과 폴란드뿐이다. 현지에선 아동 탈취 논란이 지속될 경우 한국은 내년에도 미이행 국가로 재지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셸 버니어 토스 미 국무부 특별보좌관도 청문회에서 “한국의 집행관들이 법원 명령을 따르지 않아 아동 반환 판결이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헤이그 협약은 불법적인 아동 탈취를 막고 아동이 평소 자라던 곳에서 안전하게 지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980년 제정됐다. 헤이그 사법회의도 아동이 자라던 익숙한 장소로 최대한 빨리 돌려주는 게 아동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아동 탈취로 인해 한쪽 부모와의 만남이 오랫동안 제한될 경우 아동의 의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한국도 2012년 헤이그 협약에 가입한 뒤 관련법을 시행 중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으면서 미국인 피해자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미 의회에서도 주요 이슈로 다뤄지게 됐다.

이처럼 헤이그 협약의 아동 반환 규정이 정작 국내에선 실효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부모의 아동 탈취에 관대한 사회적 정서가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라고 진단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동 인권에 관심을 기울여 온 미국과 유럽 각국은 한쪽 부모가 아이를 일방적으로 탈취하거나 숨길 경우 심각한 아동 학대라고 판단하고 중대 범죄로 대응하는 데 반해 한국은 “부모가 데리고 있는 데 뭐가 문제냐”는 등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엘 헌터 앨라배마대 교수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실제로 미 연방법은 부모의 일방적인 탈취를 범죄로 규정해 놓고 있고 법원에서도 징역형이 선고되는 사례가 흔하다”고 말했다.

반면 국내에선 부모 한쪽이 아이를 데리고 잠적하더라도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사실상 없는 상태다. 팰론처럼 아동을 탈취당한 부모가 한국 법원에서 받은 서류를 제시해도 오히려 스토킹이나 주거 침입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촌극마저 벌어질 정도다. 펠론의 사건을 맡고 있는 황윤정 변호사는 “아동을 탈취한 부모가 반환을 거부할 경우 경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돼야 하며 법원도 보다 신속히 아동 반환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동 인권·복지 훼손하는 게 문제의 본질”
코트니 매티슨(26)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서 출산 후 거주하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아들을 빼앗긴 뒤 좀처럼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부모에 의한 아동 탈취는 성별이나 국적의 문제가 아니다”며 “이기적인 한쪽 부모가 다른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아동의 인권과 복지를 훼손하는 게 문제의 본질”이라고 비판했다.

송미강 부모따돌림방지협회 대표는 “미국과 유럽에선 아동을 탈취한 뒤 다른 부모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행위를 ‘부모따돌림’으로 규정하고 엄중히 대처하고 있다”며 “부모따돌림을 경험한 아동은 성인이 되더라도 정서 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도 큰 만큼 더 늦기 전에 실효성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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