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글리시마저 트렌디한 ‘힙 코리아’ 시대 왔다
빌보드 강타한 ‘아파트’
한글도 이젠 히트 상품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들이 콩글리시를 외친다. “아파트, 아파트!”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최단 시간에 빌보드 정상을 가장 많이 밟은 미국 가수 브루노 마스의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에도 한글 ‘아파트’가 선명하다. 벨기에 래퍼 AR은 “대체 아파트가 뭐냐”며 검색하다가 ‘어떤 일을 하려는 상황에 적합하거나 딱 들어맞는…’이라는 뜻이 나오자 “이게 아닌데”라며 좌절해 웃음을 안겼다.
한글이 ‘힙(hip·멋진)’한 시대이다. 트렌드 좀 안다는 외국인이라면 한국어 가사 들어간 노래를 흥얼거리고, 부침개·소맥·막걸리 같은 한식을 즐겨야 한다. 외국 유명인이 몸에 문신으로 새길 만큼 한글은 트렌디한 문자가 됐다. 콩글리시도 아예 공식 영단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세상. 단군 이래 우리가 처음 맞는 ‘힙 코리아(멋진 한국)의 시대’다.
◇콩글리시, 공식 영단어로 신분 상승
지난달 30일 서울관광재단에 있는 한국 문화 체험 공간 ‘서울 컬쳐 라운지’. 한글 캘리그래피 수업에서 ‘사랑스러운 포리나’ 옆에 ‘귀여운 디아나’, ‘낭만적인 하스믹’이 앉아 열심히 글자를 쓰고 있었다. 저마다 자신을 표현하는 수식어를 정한 외국인들은 선생님이 써준 한글 이름을 보고 “정말 귀엽다” “막상 쓰려니 긴장돼”라며 붓펜으로 열심히 흉내 내고 있었다.
이곳은 문 연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세계 78국에서 6600여 명이 찾은 서울의 명소. “이모님, 여기 김치찌개 1인분이요” “너 술 취했니?” 같은 한국어 배우기, 한글 이름 새긴 기념품 만들기, K팝 댄스 배우기 같은 6가지 프로그램이 날마다 1~2개씩 돌아간다. 탁정삼 서울관광재단 본부장은 “외국인들 사이에 인사동에서 한글 이름 새긴 도장이 유행하더니 이제 직접 한글을 써보는 체험이 인기”라며 “몇몇 프로그램은 3주 전 예약 시작과 동시에 마감된다”고 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콩글리시의 표본으로 여겨지던 파이팅(fighting)을 ‘힘내’라는 격려의 의미로 공식 등재했다. 영어 치킨과 한국어 맥주를 합쳐 만든 ‘치맥’과 ‘먹방’ 같은 단어도 이 글로벌 영어 사전에 올랐다. 한국어와 한국식 표현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지위가 상승한 셈이다. 올해는 떡볶이·찌개·달고나 같은 단어를 추가 등재하기 위해 검토 중이라고.
지난 한글날 프랑스 리그1 이강인의 소속팀인 파리 생제르맹(PSG)은 선수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은 유니폼을 제작·판매했고, 김민재가 몸담은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은 독일 국적 선수들이 “최고야” “사랑해” 같은 한국어를 연습하는 영상을 올렸다.
◇예술로 승화하는 한글
한글은 외국인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매력 상품’이 됐다. 한글을 예술적 형상으로 보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패션계의 황제라 불린 고(故) 카를 라거펠트는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라며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의 자음과 모음이 점과 선, 면을 사용하는 추상 회화 ‘큐비즘’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작년에 한글로 ‘구찌’라 적은 한정판 제품을 내놓았고, 영국 디자이너 프린은 ‘긴장하라’는 문구가 적힌 핸드백을 패션쇼 무대에 올렸다.
한글이 세련된 그림이자 로고, 캐릭터가 되면서 기업들은 너나없이 한글 상품을 내놓는다. 다이소가 지난 8월 30일부터 내놓은 훈민정음·민화 콘셉트의 한글 제품 시리즈는 한 달도 안 돼 완판됐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도 올해 한글날을 맞아 현재 사용되지 않는 옛 한글 디자인을 적용한 ‘한글컬렉션’을 내놓았다.
한글이 몸에 새겨지기도 한다. 2024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이탈리아 체조 선수 엘리사 이오리오의 등에선 BTS 앨범 ‘러브 유어 셀프’를 옮긴 ‘당신 자신을 사랑하세요’라는 한글 문신이 발견됐다. 팝스타 라우브의 팔에는 한글로 ‘맛살’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에서 먹은 맛살이 너무 맛있어서 그랬다고.
한글을 캐릭터나 로고처럼 소비하다 보니 ‘긍정적인 에너지’라는 티셔츠를 입고 심각한 표정으로 포즈를 잡는 모델이나 한국어 욕설이 적힌 상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거 미국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신흥호남향우회’라 적힌 원피스를 입었던 것처럼 말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외설스러운 문구나 욕설이 적힌 외국어 티셔츠를 입었다가 진짜 뜻을 알고 당황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는데, 상황이 뒤집혀 이젠 ‘외국인이 입은 한글 티셔츠’를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한국 술게임은 종합 예술”
미식의 최전선에는 한식이 있다. 작년 월드 베스트 50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미국 전체 1위는 한식 레스토랑 ‘아토믹스’였다. 뉴욕의 대표적인 건물 록펠러센터는 아이스링크가 내려보이는 바로 앞 자리에 한식당 ‘나로’를 입점시켰다.
아파트 열풍으로 한국의 술 게임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놀이가 됐다. 로제가 아파트 게임을 설명하는 영상은 열흘 만에 조회 수 400만회에 육박한다. 최근 아파트만큼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 술게임은 바니바니 게임. “하늘에서 떨어진 토~끼가 하는 말”로 시작해 지목된 사람은 ‘바니바니’를 외치고, 옆에선 ‘당근 당근’을 되뇌인다. 해당 숫자가 들어간 순번이 되면 박수를 치는 3·6·9 게임이나 소주 병 안에 회오리 만드는 법 같은 술 자리 기교를 알려주는 영상도 ‘한국식 술 문화’를 궁금해하는 외국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외에서도 맥주 컵에 탁구공을 빠뜨리는 비어퐁 게임이나 플라스틱 맥주 컵을 튕겨 뒤집는 플립컵 게임을 하지만 그 부류는 각자의 개인기가 중요하다. 한국 술 게임은 주제곡 같은 노래와 동작을 다같이 하고, 관심있는 사람을 계속 지목하거나 걸린 사람 대신 술을 마셔주는 역할(흑기사·흑장미)이 있다는 게 특징으로 꼽힌다. 한국의 술 게임은 “형식은 노래와 춤이 섞인 종합 예술이고 내용은 인간관계를 가늠하는 심리 게임”이라는 평가다.
가수 윤수일의 ‘아파트’도 다시 조명받고 있다. 유튜버 ‘정했다일기석’은 윤수일과 로제, 부르노 마스가 각자의 ‘아파트’를 번갈아 부르는 것처럼 편집한 ‘아파트2′를 공개했는데 4일 만에 43만번 이상 조회됐다. “신축 아파트와 구축 아파트의 컬래버” “은마아파트보다 윤수일 아파트가 먼저 재건축 됐다” “42년째 건재한 튼튼한 아파트” 등 신박한 댓글이 달렸다. 외국인들까지 합세하면서 윤수일의 ‘아파트’ 재생 횟수도 200% 가까이 늘었다.
◇외국인 제작 콘텐츠 늘고, 짝퉁도
한국적인 것이 최신 트렌드로 여겨지면서 ‘해외에 진출할 때는 현지화한다’는 공식도 깨졌다. 걸그룹 뉴진스가 지난 6월 일본에 데뷔하며 내놓은 ‘슈퍼내추럴’은 가사의 90%가 한국어다. 해당 국가의 언어로 가사를 바꾸던 공식을 버린 것이다. 5만명 규모의 도쿄돔에서 진행한 팬미팅에서는 50대 팬들도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불렀다. 영국 BBC 스튜디오는 지난달 자연 다큐멘터리 ‘아시아’의 주제곡에 한국 민요 아리랑 가락을 반영하고, 한국어 가사를 넣었다.
해외 제작자들도 한국을 차용한다. 나이지리아 인기 래퍼가 제작한 현지 제작 청춘 드라마 ‘마이 선샤인’은 공식 포스터부터 ‘나의 햇살’이라는 한국어가 쓰였다. 주인공들은 “엄마” “어떡해” “빨리” 같은 한국어를 쉴 새 없이 뱉는다. 넷플릭스는 한국인 2세 스티븐 연을 주인공으로 한 ‘성난 사람들’로 에미상 8개 부문을 수상했고,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일본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는 첫 연출을 맡은 극장판의 배경으로 한국을 골랐다.
뭐 하나가 대박 나면 유사·짝퉁 상품도 등장하기 마련이다. 한국 소맥이 인기를 얻자 동남아 등에서는 유사 소주 상품이 마트를 채운다. 싱가포르 타이거 맥주는 ‘타이거 소주’라는 신제품을 내놓았고, 태국 소주 회사는 ‘태양소주’라는 이름으로 한국식 과일 소주를 판다.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인 벨푸드로열은 ‘로얄 강남치킨’ ‘홍대치킨’이라고 적힌 제품을, 인도밀크는 ‘서울 바나나우유’ ‘한국 딸기우유’를 판다. 현지 교민들은 “한국어가 적힌 포장지를 보고 제품을 구입했는데 ‘맛이 없다’는 반응이 많다. 한국 상품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이런 말이 나올 만큼 호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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