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지나도 좋은 디자인 만든다, 옷 짓는 철학자

서정민 2024. 11. 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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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페르호넨’ 창립자 미나가와 아키라
‘미나 페르호넨’ 창립자 미나가와 아키라. 최영재 기자
“브랜드를 지속할 때 아티스트(왼손)와 비즈니스맨(오른손)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죠. 당신은 두 가지 역할을 다 해야 하는데, 이 비율을 각각 어느 정도로 유지하나요?”

“디자인에는 상상력, 경영에는 논리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 왼손과 오른손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기도할 때처럼 늘 서로에 기대어 있어요. 그래서 모든 걸 함께 고민하죠.(웃음)”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만난 ‘미나 페르호넨(minä perhonen)’ 창립자 미나가와 아키라(57)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선문답처럼 시작됐다.

1995년 시작된 미나 페르호넨은 텍스타일(원단)을 기반으로 패션·식기·가구·인테리어·공간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현재 DDP에서 대규모 전시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의 여정: 기억의 순환’전을 열고 있다.

핀란드어로 미나(minä)는 ‘나’, 페르호넨(perhonen)은 ‘나비’를 뜻한다.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답고 경쾌한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다. 일본 브랜드지만 브랜드 명에 핀란드어를 사용한 것은 미나가와 아키라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다.

부상 탓 육상선수 꿈 접고 패션 눈떠
브랜드 대표 무늬 ‘탬버린’ 텍스타일로 제작한 디자인 가구, 소품들. [사진 미나 페르호넨]
육상 선수가 꿈이었던 그는 고교 3학년 때 발목을 다치면서 체육대학 입학을 포기했다. 다른 진로는 선택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목적도 없이 파리 여행을 떠났고 어학교를 다니던 중 우연히 일본 패션 브랜드 ‘준코 코시노’ 파리컬렉션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뭐지? 이 세계는! 내 마음속 새로운 스위치가 켜졌죠.”

귀국 후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복장학원을 다니며 패션·디자인 세계에 입문한 그는 머릿속 상상력을 종이로 옮기는 그림 그리기도 시작했다. 이후 브랜드를 창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어시장에서 참치를 손질하고, 스시집에서 스시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병행했다. 하지만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는 미나 페르호넨의 수백 가지 패턴(무늬)을 직접 손으로 스케치하고 디자인한다. 그의 독창적인 그림은 일본 아사히 신문의 연재 칼럼 ‘일요일에 생각하다’ 삽화로도 확인할 수 있다.

“패션이나 디자인, 그림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게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줬죠. 배움은 정답을 쉽게 찾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그건 외부에서 얻은 힌트라 그 답에 자꾸 나를 맞추게 되죠. 하지만 나는 늘 내 안에서 답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야 더 자유롭게 나만의 색깔을 가진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요.”

전시 마지막 공간에는 오랜 고객들이 보내온 옷과 사연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 미나 페르호넨]
돈이 생길 때마다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던 그는 북유럽 핀란드에서 미나 페르호넨을 위한 중요한 철학을 확립한다. 바로 ‘100년이 지나도 좋은 물건을 만드는 일’이다.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좋은 물건을 사서 후손에게 물려줄 만큼 오랫동안 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더군요. 시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는 질 좋은 물건을 만들어서 그 물건과 함께 좋은 기억들을 경험케 하자 생각했죠.”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패스트 패션 시대를 최대한 역행해 느리게 가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좋은 물건은 사용하는 이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그 기억은 다시 좋은 물건을 만들게 하는 힘을 갖게 한다. 이 생각은 비단 옷 생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본 전역에 위치한 16곳의 미나 페르호넨 직영점은 그 도시의 오랜 전통과 문화를 반영한 독특한 지역성을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래된 건물을 그 지역 장인들과 함께 전통방식대로 되살리고 꾸며서 앞으로의 100년을 도모한다. 브랜드가 사용하는 모든 직물을 일본에서 전량 생산하는 것은 일본 내 직물업자들의 100년을, 자투리 천 하나도 남기지 않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은 지구의 100년을 위해서다.

아사히 신문 칼럼에 삽화 그리기도
손으로 그린 무늬가 자연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미나 페르호넨’ 코트. [사진 미나 페르호넨]
“가장 최근 문을 연 이와테현 직영점을 옛날 모습으로 복원할 때는 예상보다 10억원이 넘는 돈이 더 쓰였죠. 그런데 100년의 날 수로 그 돈을 나누면 고작 하루 3000원이 든 셈이에요. 하루 3000원 투자로 오래된 좋은 풍경을 앞으로 100년 동안 더 볼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요.(웃음)”

DDP에서 내년 2월까지 진행되는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의 여정: 기억의 순환’ 전시에선 이 ‘옷 짓는 철학자’가 천천히 고집스럽지만 유쾌하게 걸어온 30년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총 11개의 공간으로 구성됐는데 어느 공간에선 동화처럼 해맑고 순수한 그림들을, 어느 공간에선 오랜 단골들이 보내온 옷과 편지를 볼 수 있다. 또 어느 공간에선 엄마와 딸이 함께 입어도 좋을 지속가능한 옷들을, 또 어느 공간에선 한국 공예작가 4인과 협업한 매력적인 가구들을 만날 수 있다. 알록달록한 컬러, 기분 좋아지는 스케치, 부드러운 질감의 원단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전시다.

“물건은 오래 사용할수록 생명력이 길어지고, 그것을 매개체로 한 특별한 날들의 기억 또한 두껍게 쌓이죠. 우리 일상 속에 과연 어떤 특별함이 숨어 있는지 찾아보길 바라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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