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집] 자유·평화·죽음·고통…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라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유선혜 시집 | 170쪽 | 문학과지성사 | 1만2000원
여기 구멍에 대해 질문하는 시인이 있다. ‘양말에 뚫린 구멍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철학 퀴즈 같은 이 알쏭달쏭한 질문의 정답은 뭘까. 상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양말의 입장에서 볼 때 구멍은 무언가의 훼손일 뿐, 우리가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시인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존재의 구멍/ 구멍의 존재/ 그것은 여기에 있습니다’(‘구멍의 존재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유선혜 시인의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는 구멍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심지어 ‘제가 키우는 귀여운 구멍’(‘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을 소개하며, 구멍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중이다. 이상하게 들리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구멍이 존재한다고 착각해버리면, 세상의 모든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고 말해야 공평해지니 말이다. 그것이 이 시집의 핵심 포인트다. 시인은 모든 ‘없는 것들의 있음’을 상상하는 것, ‘맘껏 착각하는 것/ 그게 우리의 임무’(‘그게 우리의 임무지’)라고 선언한다.
낯선 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을 채우는 수많은 것들, 가령 자유·평화·고통·기억·죽음 등이 눈으로 확인될 수 없는 ‘없는 것’들 아닐까.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인간의 세계는 정말 빈곤해져 버릴 것이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는 이처럼 ‘가능하다고 말하면/ 세계가 생기는’(‘비어 있는 방’) 없는 것들이 있는 세계이다. 없음을 사랑하라는 것. 그것은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역량에 대한 시적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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