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뒷산에서 웬 고어텍스냐고요?
그런데 박은영(53·경기도 고양시)씨는 “등산모임에 나갔더니 회원들이 특정 브랜드의 고급 등산복을 유니폼처럼 입고 있더라”며 “나도 따라 살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별것 갖고 다 걱정”이라며 핀잔했다지요. 과연 ‘별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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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닝화 계급’ 이전에 ‘등산복 계급’
20년 논쟁…만족 위한 선택의 문제
」
‘뒷산 가는데 웬 고어텍스’라고도 하지요. 고어텍스는 고급 기능성 의류를 상징합니다. 올해 게임에 자리를 빼앗기기 전까지 지난 20년간 한국인 취미 1위(한국갤럽)였던 등산의 해묵은 논쟁거리이자 조롱거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옮은 취미가 요즘 2030세대를 중심으로 인기입니다. 달리기(러닝)입니다. 고급 러닝 의류 매출이 늘고 ‘러닝화 계급’까지 등장했습니다.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 킵초케 같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쓴다는 고기능성 30만원대 카본 러닝화도 불티나게 팔린다지요. 이미 20여 년 전부터 ‘등산복 계급’이 나와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있으니 등산이 형님뻘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등산은 ‘차비만 있으면 된다’고들 하지만, 파고들수록 돈이 많이 듭니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는 “야구·등산·자전거·골프는 소비 성향이 강한 대표적인 종목”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뒷산 가는데 웬 고어텍스’는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간 관련 논문이 우수수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동네 달리는데 웬 카본 러닝화’를 설명하는 데 적용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이유진 서울시립대 연구교수는 논문을 통해 “상품과의 긴밀성은 자기 확신으로 이어질 수 있고, 여가 만족감을 넘어 일상의 행복을 증가시킨다”고 전했습니다. 이정래 경북대 교수는 “중장년층은 고가 등산복 소비를 통해 자기만족을 갖고, 등산 상급자들은 비싼 장비를 경력과 열정이 새겨진 상징적 자본으로 인식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유진 교수는 등산대회 참가자 500명을 대상으로 이전 연구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과시적 여가소비 초기에는 만족도가 오르지만, 이후 감소한다”며 “점점 돈을 들여도 초기의 만족도에 이르지 못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이 교수는 통화에서 “앞부분만 보면 자칫 과소비를 부추기는 결론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과소비의 경험이 순간의 만족을 주지만 장기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도껏 해야 만족도가 높다’는 뜻입니다.
‘뒷산 가는데 웬 고어텍스’를 풍자하는 책도 있습니다. 류웅재 한양대 교수가 쓴 『고어텍스와 소나무』입니다. 여기서 소나무는 뒷산을 상징합니다. 고어텍스는 과잉의 물질문화를 뜻합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물신화(fetishism) 개념 또한 우리 사회의 아웃도어 열기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고 류 교수는 이 책에 씁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일종의 허위의식… 현실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힘을 가진다’라는 표현도 적습니다. 경쟁하듯 장비에 집착하다가 산에 가는 원래의 의미는 늦가을 단풍잎처럼 퇴색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상춘객보다 단풍객입니다. 봄보다 가을 나들이가 더 많다는 말이죠. 국립공원의 지난해 10, 11월 탐방객은 93만 명. 4, 5월의 70만 명을 앞섭니다(국립공원 기본통계). 박은영씨도 그중 한 명입니다. 장난스레 이죽거리던 남편이 진지하게 조언했습니다.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봐. 남 따라 하지 말고.” 박씨는 결국 방수·투습 재킷을 샀습니다. 그는 “주말이 기다려진다. 설렌다”고 했습니다. 얼마짜리인지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만의 스타일을 찾아 만족감을 넘어 행복을 얻으면 되니까요. 등산도 러닝도, 개인 선택과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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