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하고 구수한 호박고지찌개, 능이 향 깊은 버섯찌개

2024. 11. 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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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끝〉
가을 야생 버섯이나 봄 산나물의 계절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명절이나 제사 챙기듯 뭔가 시늉이라도 하고 지나간다. 가을 버섯은 통상 백로~한로, 9~10월 초가 제철이다. 빠르면 8월 중순, 늦은 건 11월 중순까지 나온다. 최악의 버섯 흉년으로 기록될 올해는 늦더위로 그 시기가 한 달 가까이 뒤로 밀렸다. 10월 중순 이후 시장에는 버섯들이 순서 없이 마구 섞여 나오고 있다.

올해도 개천절에 길을 나섰다. 충북 옥천으로 가는 길에 이 계절이면 버섯이 많이 나오는 대전 역전시장 노점과 옥천 공설시장을 살펴봤다. 한 곳만 강원도산 능이와 싸리버섯을 팔고 있었다. 버섯 구경은 못 하고, 주요 산지인 영동·옥천 일대에 아직 버섯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늦더위로 버섯 흉년, 속초·양양 등서 사와
식당 옆 밭에서 직접 키운 애호박을 햇볕에 말려 끓인 호박고지찌개. [사진 이택희]
찾아가는 버섯 음식점은 지난 1월 충북 옥천에 갈 때 두 현지 전문가 추천으로 갔던 곳이다. 토박이 지역 언론인과 그곳에 살면서 음식을 주제로 시집 한 권을 낸 시인이다. 차병천(72)·전화자(65)씨 부부와 아들 승준(42)씨가 운영하는 이 가족 음식점 상호는 ‘옥천왕족발보쌈’인데 더 입맛을 당기는 건 두 가지 찌개였다. 버섯찌개와 호박고지찌개다.

평소 무시로 그리워하는 향수 음식이자 별미여서 주문부터 쉽지 않았다. 버섯찌개는 10월에 다시 오기를 기약하며 호박고지찌개를 골랐다. 전국을 다녀도 호박고지찌개를 하는 음식점이 드문데 대전이나 옥천에는 더러 보인다. 대전에서 호박고지 음식을 하는 집은 대개 옥천에 연고가 있다. 말하자면 이 음식의 원류는 옥천이라 할 수 있고, 기왕 왔으니 이걸 먼저 먹자고 선택한 것이다.

찌개를 준비하는 동안 나온 여섯 가지 반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고춧잎무침·고추부각·총각김치·채 썬 무장아찌무침·콩나물무침·어묵볶음. 맛도 보기 전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갔을 때는 열무김치·총각김치·고춧잎나물·고추부각·가지볶음·꽈리고추 멸치볶음이 나왔다. 반찬의 농산물은 모두 식당 둘레 3300㎡(1000평) 논밭에서 농사지어 쓴다. 두 차례 6찬 차림에서 어묵과 멸치 말고는 다 자가 생산했다는 말이다. 맛은 순박, 순정-꾸밈없고 순수하며 정직하다. 소박하고 깔끔하지만 모자람 없는 맛이다.

버섯찌개에는 야생 버섯 7~10가지가 들어간다. [사진 이택희]
찌개에는 호박고지와 껍질 붙은 돼지 쫄대기살(사태)이 푸짐하다. 익은 김치도 살짝 넣어 국물이 칼칼하고 시원하다. 햇볕에 마르면서 농축돼 풋풋하고 구수한 호박고지 진한 맛이 국물에 녹아 맛이 깊다. 식탁에서 끓으면서 우러난 호박고지 즙은 풍미를 더 깊게 하고, 씹는 느낌이 하나하나 다른 호박고지 질감도 조금씩 변하며 다채로운 미각을 보여준다. 직접 재배해 햇볕에 사흘 건조한 호박고지 덕분이다. 애호박을 건조기 고열에 빠르게 말려 찌개를 끓이면 바로 풀어져 특유의 쫄깃한 맛이 안 나서 자연 건조한 것만 쓴다. 양념도 문전 옥토에서 자가 생산한 걸 써 음식 맛이 전통 농경사회 시절 그대로다.

버섯찌개를 먹으러 갔더니 주인은 산에서 버섯이 나지 않는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예년에는 좋은 자리 만나면 하루에 100㎏을 딴 적도 있는데 올해는 8~9월 내내 따온 게 100㎏ 조금 넘는다고 한다. 버섯은 해마다 옥천군 동남부 산간과 영동군 상촌, 궁촌, 물한 등지의 가족만 아는 자리에서 채취한다. 올해는 늘 나던 자리에 몇 번 가봤지만 버섯이 없었다. 승준씨는 “버섯찌개에 가장 많이 쓰는 참나무버섯(표준명 뽕나무버섯부치)이 8월에 많이 나는데 아직 못 땄으니 올해는 끝난 듯하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1년치 쓸 버섯을 구하기 위해 가족은 산이 아니라 강원도 속초·양양·강릉·삼척 오일장을 쫓아다녀 웬만큼은 비축했다.

매일 문 열지만 가려면 미리 전화 확인을
봄에 말려둔 가죽나물을 불려 부친 가죽전은 식당에선 맛보기 힘든 음식이다. [사진 이택희]
이 집 버섯찌개에는 능이가 조금이라도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두어 가닥 능이가 찌개 향을 장악한다. 거기에 참나무버섯, 밤버섯, 싸리버섯, 밀버섯, 땅느타리와 잡버섯까지 8~10가지쯤 들어간다. 여름~가을에는 애호박, 겨울~봄에는 월동 무를 섞는다. 돼지 사태살과 익은 김치에 양념으로 마늘·대파·고춧가루·고추장·후추를 넣는 건 두 찌개가 똑같다. 더 들어가는 건 없는지 묻자 전 여사는 “다○다 가루도 쬐끔 들어가요” 하면서 아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놓는 걸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여” 한다. 이런 마음으로 요리한 음식 맛이 어찌 정직하고 순박하지 않으랴. 염장해 저온창고에 두고 쓰는 찌개의 버섯들은 저마다 맛과 향을 잃지 않고 고스란히 품고 있다. 원물 상태를 잘 보전하는, 오랜 세월 몸에 밴 보관 기술이 비법인 듯하다.

1월에 없던 새로운 메뉴가 눈에 띄었다. 충청도식 가죽(표준명 참죽)나물 전이다. 봄에 꺾은 나무순을 삶아 말려 둔 걸 불려서 10가닥쯤 나란히 펼쳐놓고 전을 부쳤다. 밭 둘레에 심은 나무가 자라 수확할 수 있게 돼서 집에서 해 먹던 음식을 메뉴로 올렸다고 한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희귀한 음식이고, 내용이 아주 실하다. 정해진 휴일 없이 매일 문을 열지만 사정이 있으면 언제라도 쉬고, 음식을 많이 준비하지 않으니 가려면 미리 전화해 알아보고 가는 게 좋다.

버섯과 산나물에 관한 집착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산골에서 자란 어릴 적 향수를 달래주는 위안음식(Comfort food)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생활에서 점차 멀어지는 이런 음식 유산이 기후 위기 시대 사람을 살릴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자연 채취 식품은 기후변화가 갈수록 빠르고 심해져 문명사적 위기에 직면한 인류의 마지막 식품창고가 될 것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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