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플라톤의 조언 “철학보다 체육·음률 먼저 교육”
━
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2013년 8월 14일, 유럽과 미국의 주요 언론은 로마의 남동쪽 젠차노 지역에서 작은 콜로세움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미국 몽클레어 주립대 연구팀이 1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개인용 콜로세움’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크기는 가로 약 61m, 세로 약 40m이다. 건축 시기는 2세기로 추정했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처한 황제가 야수들을 죽이는 장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로마에 가면 박물관에서 콤모두스의 대리석 전신상이나 반신상을 볼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창을 든 콤모두스의 전신상이, 카피톨리니 박물관에는 반신상이 있다. 카피톨리니의 콤모두스는 기괴하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 아가리로 얼굴을 내밀어 사자 대가리를 투구처럼 썼다. 오른손에는 올리브 나무 몽둥이를 들었다. 헤라클레스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 가운데 최고 스타지만 팔자는 기구하기 짝이 없다. 올림푸스의 주신(主神) 제우스가 미케네 공주 알크메네를 건드려 낳은 아이가 헤라클레스다. 제우스가 욕심을 채운 결과로 세상에 나온 소생치고 행복한 경우는 없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곱게 놔두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그 유명한 ‘12과업’도 헤라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한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저주를 받아 이성을 잃는다. 미쳐버린 그의 눈에 아내인 메가라는 암사자로, 아이들은 하이에나로 보인다. 헤라클레스는 결국 부인과 아들 셋의 숨을 끊는다. 12과업은 그 죗값을 치르는 과정이다. 첫 과업은 네메아에 출몰하는 사자를 퇴치하는 일. 헤라클레스는 사자를 죽인 다음 가죽을 벗겨 걸치고, 대가리를 투구처럼 머리에 썼다. 판본에 따라 ‘키타이온의 사자’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콤모두스는 그 흉내를 냈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를 가문의 시조로 떠받들었다. 그도 사자 머리 모양으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병사들 사이를 누볐다. 기원전 327년에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점령했다. 이때 전해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그리스 미술과 인도 미술이 혼합되어 간다라 양식이라는 하이브리드 미술양식이 탄생한다.
간다라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는 불교 예술이다. 불상 조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스의 신인 아폴로나 제우스를 연상시키는 얼굴에 로마의 성인들이 입던 토가와 같은 옷을 걸친 모습이다. 간다라 미술은 중국, 중앙아시아는 물론 한반도와 일본까지 영향을 미친다. 경주 석굴암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통일신라기 불교미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 정도 되면 헤라클레스의 자손이라고 허풍을 쳐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와 달리 물려받은 제국을 말아먹은 콤모두스가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처했을 때는 비웃거나 개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콤모두스가 검투사 놀이에 미쳐 버렸다. 검투사 되기를 소원하여 검투사 숙소에서 그들과 똑같이 먹고 자며 생활하겠다고 해서 신하들의 진땀을 뺐다.
그러나 콤모두스가 대책 없이 헤라클레스 흉내나 낸 팔푼이는 아니었다.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었고 힘도 장사였다. 검투사 경기에도 나갔는데 무패의 전적을 남겼다. 콤모두스의 칼 아래 쓰러진 상대는 대개 부상자, 병자,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직업 검투사들에게 이긴 기록도 있다. 모두 상대의 항복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황제의 칼에 희생된 직업 검투사는 한 명도 없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도 콜로세움에 뛰어들어 검을 휘두르는 콤모두스가 등장한다. 영화 속 콤모두스는 주인공 막시무스의 손에 죽는다. 그러나 역사 속의 콤모두스는 콜로세움에서 죽지 않았다. 그는 서기 192년 12월 31일 밤 로마 황궁의 욕실에서 측근의 손에 목 졸려 죽는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황음무도한 폭군이 측근의 손에 죽는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아이러니다.
콤모두스의 암살은 애첩 마르키아와 황제의 잠자리를 돌보는 하인 에클렉투스가 모의했다. 에클렉투스가 마르키아와 내연관계였다는 말도 있다. 황제가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괴로워하는 틈에 나르키소스라는 자가 목을 졸랐다는 것이다. 나르키소스는 콤모두스의 레슬링 코치이자 스파링 파트너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완력이 뛰어난 데다 검투사 훈련으로 단련된 콤모두스를 죽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윤기는 레슬링을 ‘사람 죽이는 기술’이라고 혐오했다. 하지만 레슬링 경기를 보면 ‘저래 가지고 사람이 죽겠나’ 싶다. 상대 선수 뒤로 돌아가 붙들면 1점을 주고, 한 번에 승부가 갈리는 ‘폴’도 상대 선수의 양 어깨를 딱 1초만 매트에 눌러 놓으면 된다. 두 어깨가 땅에 닿아서 죽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와 레슬링을 해서 이긴 다음 올림푸스의 일인자가 됐다는 신화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평화적인 정권교체?
어떤 무술이든 치명적 필살기가 있어
격투기 전문가들에게 물으면 대개 “어떤 무술이든 필살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태권도를 ‘발도장’이나 ‘발펜싱’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누구든 태권도 선수에게 제대로 맞으면 목숨이 위태롭다. 2020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의 한 클럽에서 태권도를 전공한 체육대학교 학생 3명이 또래의 남성을 때려죽인 사건을 기억하라. 피해자의 여자 친구를 집적거리다 시비를 벌인 끝에 살인에 이른 이 사건은 다음에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아무튼 신들의 세계 패권을 놓고 벌인 제우스와 크로노스의 레슬링 한 판도 목숨을 건 싸움이었음에 틀림없다. 어깨가 남달리 넓었다는 아테네의 젊은 철학자도 레슬링을 호신술 삼아 연마했을까? 젊은이는 올림픽 버금가는 이스트미아 제전에 나가 우승한 적도 있다. 원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은 그의 넓은 어깨를 보고 감탄한 레슬링 코치가 붙여준 별명, 플라톤이다. 한 마디로 ‘어깨가 넓은 친구’라는 뜻이다.
플라톤은 운동 좀 해본 지식인이다. 그런 그에게 교육의 길을 묻자 ‘청소년이 철학을 배우기 전에 체육과 음률(단순화하면 음악과 시)부터 가르치라’고 권했다. 그의 시대에 철학이란 곧 학문이고, 체육과 음률은 인간의 근기(根基)를 기르는 행위였다. 체육과 음률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선 안 될 저울과 같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2500년 뒤에도 살아 숨 쉬는 교육 이데아.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실에서는 아득히 멀다.
“신체를 위한 것은 체육, 영혼을 위한 것은 음률일세. 음률은 소홀히 하면서, 평생 체육만 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자넨 알아채지 않았던가? 그와 반대로 버릇이 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는 어떨까? 음악과 체육을 가장 훌륭하게 섞어서 알맞게 영혼에 적용하는 사람이야말로 현(絃)을 조율하는 사람보다 훨씬 완전하고 조화를 이룬 음악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일세.”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