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잠겨선 안 돼”…사진으로 지킨 해녀들

유주현 2024. 11. 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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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사진가 양종훈이 기록한 제주해녀
‘탐라의 여자들이 잠수를 잘한다/열 살 때 벌써 앞 냇가에서 배운다 한다(…)/잠녀, 잠녀 그대들 즐거워 떠들고 있다마는/보는 나는 슬프구나.’ 조선 후기 문인 신광수(1712~1775)의 ‘잠녀가’ 일부다. 시가 예견한 것처럼 해녀에겐 애상(哀喪)의 정서가 있다. 고령화로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이라서일까. 젊은 해녀문화의 화려한 부활을 외치며 ‘삼춘들’에게서 강한 리더십과 공동체 정신을 발굴하는 사람이 있다. “사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양종훈이다.

상군해녀도 문어를 잡는 것은 운이 따라야지만, 그걸 촬영한 건 용왕님이 주신 ‘로또’다.
중국계 자본이 투자한 제주신화월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 리조트다. 여의도 면적의 80%에 달하는 부지 250만㎡에 펼쳐진 호텔과 쇼핑몰, 테마파크, 컨벤션 센터에 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의 발길이 분주하다. 그런데 지난 7월부터 호텔 로비와 쇼핑몰 입구 등 곳곳에 특설 전시장을 마련하고 커다란 해녀 사진들을 걸어 놨다. 최신식 관광 시설에 해녀 할머니 사진이 웬 말인가 싶지만, 해녀는 제주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제주도의 보물로 대접 받아야 할 해녀가 우리 무의식 속에서 소외 받고 있다는 뜻이다.

제주해녀문화예술연구협회가 신화월드에서 ‘신규해녀 양성 및 해녀문화 계승을 위한 제주해녀 사진전’을 연 이유다. 에이즈 환자 사진집, 동티모르 사진전 등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양종훈 상명대 교수의 작품들로, 지난해 일본에서 1년간 큰 인기를 끌었던 전시다. 신화월드 도처에 흩어진 전시 중에서도 영화관 로비에 도열한 초상 사진 시리즈 앞에서 왠지 경건해진다. 깊은 바닷속처럼 어두운 바탕에 잠수복 차림으로 떠오르는 해녀 삼춘(제주에서 남녀 구분 없이 어른에 통용되는 호칭)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해맑게 웃고 있다. 여인들이 청춘을 바친 ‘물질’이라는 직업에 대한 경의와도 같은 사진들이다. “제주의 보물인 해녀를 지키고 싶었어요. 해녀들에게 용기와 자부심을 줘야 해녀문화도 발전하지 않을까요.”

양종훈 교수는 해녀뿐 아니라 에이즈 환자, 호주 원주민 등 평생 마이너리티를 피사체로 삼아왔다. ‘내가 다룬 소재가 대상자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숙명이죠. 촬영하고 전시하고 책 만들고 끝내는 게 아니라, 사진으로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게 진정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자세니까요.”

해녀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2분이상 물질을 한 해녀 삼춘의 숨비소리를 사진에 담았다.
제주 출신인 그가 해녀를 앵글에 담은 건 2000년부터. 어린 시절 바다에서 자라며 ‘해녀 삼춘’의 위대함을 목격해 왔지만, 그들을 찍게 된 건 위기의식 때문이다. “우연히 해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인원수는 줄어드는데 사망 사고가 늘고, 공동체까지 흔들리는 총체적 난국이란 거죠. 2016년 유네스코, 지난해 유엔 식량농업기구 유산까지 등재됐지만, 여전히 위기에요. 한때 2만 명도 넘었던 해녀가 2800명 밖에 남지 않았죠. 이대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있습니다.”
해녀 촬영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산소공급장치 없이 1~2분을 물속에서 견디는 해녀들의 잠수 실력을 감히 흉내낼 수 없다. “숨은 30~40초 참을 수 있지만 자꾸 물 위로 떠오르거든요. 해녀 삼춘들이 나를 잡고 내려가 줘야 하죠. 바위 사이에 발을 집어넣고 촬영하다가 못 빠져나와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초기엔 해녀 삼춘들이 사진 촬영을 거부하기도 했고요. 사진 찍으면 혼이 나간다고.(웃음) 제주 방언이 삼춘들과 연결고리가 돼줬고, 꾸준히 전시를 하며 소통을 했죠. 몇 년 전 제주공항에서 했던 대규모 사진전 이후 이젠 너도나도 촬영해 달라고 하십니다.”

요즘 그는 해녀 명예 회복에 나섰다. 1500년 역사와 전통을 인정받는 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극했어도, ‘아시아 최초의 전문직업여성’인 해녀 개개인은 명예를 갖지 못했다는 자각에서다. 지난해 협회를 발족해 ‘제주해녀의 위대함을 전세계에 알린다’는 목표로 일본과 중국에서 사진전과 워크샵을 열었고, 지난 5월엔 첫 ‘해녀 은퇴식’을 개최했다. “70년 넘게 물질을 한 해녀들도 은퇴식이 없었어요. ‘삼춘, 낼부터 물질하지 맙성’이란 어촌계장의 한마디가 다였죠. 첫 은퇴식이 알려지니 어촌계 별로 수요가 생기네요. 부름이 있는 곳에 달려가고 있습니다.”

매년 300명 은퇴, 신규 해녀는 30명
물질을 끝내고 돌아가던 해녀삼춘을 밭에서 뛰놀던 말이 무언의 사인을 보내더니 자연스럽게 등에 태운다. [사진 양종훈]
지난달 개최한 ‘제주해녀 대상군 명인명장 헌정식’도 같은 맥락이다. 해녀 최고 계급 ‘대상군’ 중에서 50년 이상 경력의 명인 7명과 30년 이상 경력의 명장 6명을 선정했다. ‘명인명장’ 보다 ‘대상군’에 방점이 찍힌다. 힘의 논리를 넘어 상부상조하는 해녀들의 고유한 공동체 정신을 ‘대상군’ 리더십에서 찾으려는 시도다. 이 공동체 정신이 바로 유네스코가 평가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이다.
해녀학교를 운영하는 법환 어촌계 베테랑 해녀삼춘과 새내기 해녀간의 아름다운 조화. [사진 양종훈]
“만일 해녀 아닌 해남이었다면 이런 가치가 없었을 겁니다. 제주도는 고대부터 완벽한 모계사회였고,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었어요. 해녀들은 신입과 원로의 몫을 따로 챙겨주는 문화인데, 가족을 거느리는 어머니의 리더십이 해녀 공동체로 확장되어 부족장 같은 역할을 한 것이죠. 그런 대상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는 겁니다.”

해녀사회의 현실적인 화두는 고령화다. 두 곳의 해녀학교에서 새내기를 양성하고 있지만, 매년 은퇴자가 300명이 넘고 신규는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가 고등학생들로 해녀 서포터스를 구성하고, 디자인과 기능성을 고려한 잠수복 리뉴얼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새내기 해녀들에게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다. “새내기들에게 어촌계의 진입장벽이 높거든요. 해녀 삼춘들과 새내기의 커뮤니케이션도 잘 되지 않고요. 대상군의 부활도 큰 보람이 있지만, 앞으로는 해녀 삼춘들과 새내기 간의 소통에 헌신하고 싶어요. 그것이야말로 제주해녀의 공동체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니까요.”

■ 제주해녀 대상군 명인명장 13명 선정

지난달 18일 국립제주박물관 대강당. 도의원·교육감 등 지역 유력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상군 명인명장’ 13인이 헌정패와 함께 양종훈 교수 작품인 근사한 초상 사진을 한 장씩 받아들었다(사진). 수협중앙회와 도내 5개 수협의 추천과 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친 ‘명인명장’ 말고도 현장은 ‘삼춘’들로 붐볐다. 각 어촌계 동료들이 ‘대상군’의 경사를 축하하러 함께 온 것이다. “당연히 와야지. 해녀들끼리는 자기 식구들보다 가까워. 물에 들어가는 시간부터 모든 행동을 단체로 움직여야 하니까 우린 한몸이나 마찬가지지.” 모슬포해협 화순어촌계에서 김숙자 명인을 축하하러 온 ‘삼춘’들의 이구동성이다.

88세 김숙자 명인은 지금도 물질은 물론 오토바이까지 타고 다닌다는데, “열다섯 살 때부터 물질을 했는데, 90살까지는 하고 싶다”면서 “바다 풍경을 만나면 용궁처럼 아름답고 마음이 시원해진다. 그래서 건강한 것 같다”고 했다. 서귀포수협 위미1리어촌계 이복렬 명인(80)도 “한평생 60년 넘게 바다에 종사하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 고생한 건 다 잊었고, 오늘 기분 좋은 덕에 10년은 수명이 연장된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평범한 할머니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바다의 대장군들이다. 직업 해녀는 숙련도에 따라 상·중·하군으로 나뉘는데, 가장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상군 중에도 리더십과 덕망을 갖춘 최종 보스가 공동체 리더인 ‘대상군’으로 추대됐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외지에서 온 젊은 해녀 영옥(한지민)으로 인한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한 춘희삼춘(고두심)이 대상군인 셈이다. 제주의 103개 어촌계마다 리더가 있지만, 어업 근대화와 함께 ‘대상군’이 사라지고 수협 해녀회장 개념으로 대체되면서 해녀문화 색깔도 엷어졌다.

이날 행사는 상징적 명칭 ‘대상군’을 부활시켜 공동체 문화 회복을 꾀하자는 의도로 기획됐다.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고 할 정도로 생명을 담보로 작업하는 해녀는 리스크에 비례해 엄청난 리더십이 필요하다. 저승길을 오가는 직업적 전투에서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게 대상군”이라면서 “해녀문화 계승을 위해서 해녀의 가장 명예로운 이름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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