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60] 시인의 호반
60년대를 대표했던 청춘 스타 내털리 우드가 학교 수업 시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는 시구절을 낭송하던 모습은 지금도 가끔 회자된다. 영화 ‘초원의 빛(Splendour in the Grass)’의 한 장면이다. 영화의 제목은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워즈워스는 영국의 북서부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며 시를 썼다. 스코틀랜드와의 경계에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크고 작은 호수들이 위치한 지역이다. 워즈워스는 소년 시절부터 호숫가와 동산을 마음껏 뛰어다녔고 성인이 되어서도 매일 산책을 즐겼다. 그의 삶은 검소했지만 생각은 고상했다. 걷는 것은 영적인 행위라는 생각으로 구불거리는 언덕을 걸으며 풀, 꽃, 새, 냇물, 구름, 나비, 하늘과 숲을 관찰했다. 그리곤 호숫가에서 무지개를 볼 때마다 자신의 글을 하나씩 매듭을 지어 나갔다. 특히 해 질 무렵의 산책을 즐겼는데, 이는 곧 시(詩)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시를 “평온함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라고 믿었고, 기교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분히 일상적인 시어(詩語)를 선택해서 사용하는 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평생 30만 킬로의 거리를 산책하며 지은 시 ‘나비에게’, ‘데이지에게’, 그리고 ‘서곡’은 영국 문학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로버트 사우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함께 ‘호반의 시인(Lake Poets)’으로 불리는 그의 집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코커머스(Cockermouth)에 있다. 워즈워스는 자신의 뒷마당 정원을 지극히 사랑했고, 누군가를 인근의 호수로 초대하는 것을 가장 극진한 접대라고 생각했다. 워즈워스 사망으로부터 250년이 더 지났지만 그 호수는 여전히 평화로움과 문학적 영감으로 전 세계의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특유의 고요함 속 쓸쓸함을 더해주는 늦가을 호숫가 정취는 아름답다. 인간의 정서를 함양시키는 경관과 자연, 문화를 보존한 가치를 인정받은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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