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의 금감원' 불러들인 최윤범 회장의 결정적 오판 [차준호의 썬데이IB]
금감원 불러들인 최악의 한수...기재 실수 해명에도 금감원 조사
주가 고공행진에 우군 이탈 가능성..."최 회장 초조함 드러낸 것" 분석도
공개매수-유상증자 사실상 '하나의 시나리오' 의혹도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MBK파트너스·영풍 연합의 경영권 분쟁 과정이 추후에 책이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가장 극적인 장면은 10월 30일 오전, 최 회장이 주재한 고려아연의 이사회다. 양측의 팽팽한 대치가 최 회장 측의 단 한 번의 결정적 오판으로 극적으로 뒤집힌 순간이기 때문이다.
공시 직후 하한가로 급락한 회사 주가와 주주들의 원성은 시작에 불과했다. MBK로 대표 되는 '야만인들'에 시달리던 최 회장과 이사회는 이제 '문 앞의 금융감독원'까지 맞이하게 됐다. 이사회 참석자들과 회사 측이 의사결정의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면서 시장에는 여러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자폭 유상증자 왜?...우군 떠났나
최 회장 측은 2조5000억원 유상증자안 외에 이사회 결정 직전까지도 보유 중인 자사주 2.4% 중 1.4%를 우리사주조합에 넘겨 의결권을 부활시키는 방안을 안건으로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폭탄 유상증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논란과 법적 쟁점이 잇따랐겠지만 지금처럼 큰 파장을 일으킬 사안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MBK와 영풍 연합 측도 우리사주를 활용한 시나리오를 유력하게 보고 대응 준비를 서둘렀지만 내부에선 "밀어붙이면 당장 막아세울 시간이 없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유상증자는 이론상 가능하지만 시장에 줄 충격과 주주들의 민심 이반을 고려할 때 이를 단행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게 MBK 측 관계자들의 분위기다.
첫 번째 변수로는 최 회장이 믿었던 우군들의 '배신'이 꼽힌다. 지난달 23일 자사주 공개매수에 최 회장 측이 우군으로 고려했던 상당수가 참여해 시세 차익을 본 것 아니냐는 설명이다. 현재 최 회장의 우군으로 분류되는 곳들은 현대자동차(5.0%) 한화(7.75%) LG화학(1.89%), 한국투자증권(0.77%), 한국타이어(0.75%) 등 대기업이다. 자신에 편에서 의결권을 행사해줄 것으로 믿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주식을 팔고 나가자 최 회장 측이 이성을 잃은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만약 우군으로 분류된 대기업들이 공개매수에 참여하지 않고 지분을 그대로 보유했다면 이번 유상증자로 대거 희석되고, 가치도 급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군 대부분이 상장사인 점을 고려할 때 각 사 주주들의 문제제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영진과 이사회의 '보신주의'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주가가 150만원까지 폭등한 상황에서 우리사주 청약을 위해 회사가 무상으로 분배허거나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주식을 사도록 돕는다면 이는 경영진에 대한 배임 이슈로 번질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느니 시장에 충격은 있겠지만 당시로선 뚜렷한 위법이 드러나지 않았던 유상증자를 택했을 가능성이다.
다만 자본시장 질서를 흔든 전례없는 행보에 금융감독원이 움직이면서 상황은 더 꼬이게 됐다. 금융당국은 전날 미래에셋증권에 대한 현장 조사에 돌입한 데 이어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했다. 추후 조사 과정에서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가 드러나면 당시 결정에 참여한 이사진은 물론 참석하지 않은 이사진까지도 처벌될 수 있다는 게 현재 법원의 스탠스다.
고려아연은 뒤늦게 "저금리의 부채조달을 위해 증권사와 한 회사채·기업어음(CP) 등 부채조달 방안을 검토한 것이 잘못 표기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금감원과 시장 모두 믿지 않는 분위기다.
공개매수-유상증자는 원래 '한몸'?
최악의 가능성은 고려아연이 대규모 유상증자를 사실상 처음부터 염두해두고 자사주 공개매수에 나섰을 때다. 두 행보가 사실상 하나의 시나리오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IB업계에선 최 회장을 포함한 경영진이 MBK파트너스의 공개매수를 쉽게 저지할 수 있는 자사주 신탁계약 발표 대신 자사주 공개매수를 발표한 데 의아하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MBK의 공개매수 기간에 매입 단가와 규모를 모두 열어둔 자사주 신탁계약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고려아연의 주가를 요동치게 만들어 쉽게 승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SM엔터테인먼트를 둔 하이브와 카카오간 공개매수 과정에서 SM엔터 경영진이 활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당시 자사주 매입을 지시한 SM엔터 경영진도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차일피일 늦춰지고 있다.
다만 이 경우 MBK파트너스의 공개매수 성패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어야하는 만큼 불확실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주주 구성을 뒤엎고 의결권을 자신 측으로 확실히 가져올 수 있는 방안인 유상증자를 단행하려면 '재무구조 개선' 명분을 만들어야하는 데 자사주 신탁 계약 만으론 이를 위한 대규모 차입을 일으키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당장 3조원의 현금이 투입되는 자사주 공개매수를 택한 후 유상증자를 진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한투 베인으로 금감원 칼날 이어질 듯
베인캐피탈과 체결한 주주간 계약도 도마 위에 올랐다. 베인은 최 회장의 우군으로 나서 고려아연 지분 1.4%를 2592억원에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투자증권에서 2073억원을 인수금융으로 빌렸는데 담보로 자신들의 보유 지분 1.4%는 물론 본인 및 일가가 보유한 주식 5.1%이 제공했다. 주당 89만원을 기준으로 이 가격만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양측 협상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지만 시장에선 공개매수 직후에 있을 유상증자로 주가가 급락하면서 베인 측이 자칫 추가 담보를 넣어야하거나 마진콜에 직면할 위기를 최 회장 측이 사전에 막아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금융감독원이 미래에셋증권에 이어 베인캐피탈과 한국투자증권을 추가 조사해 상황을 면밀히 따져봐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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