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문화에서 이룬 ‘한강의 기적’인가

한겨레 2024. 11. 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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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현의 커넥션
(28) 한강의 기적
영어를 포함해 다른 언어로 번역된 한강 작가의 소설들. 세계는 우리나라 물질 문명 발전을 보고 한강의 기적이라 하였다. 이제 우리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도 한강의 기적을 말할 시간이 기다려진다. 노벨상위원회

“가와바타와 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 오에 겐자부로 (1935~2023) -

“기차는 긴 터널을 빠져나와 설국으로 들어섰다.”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설국’은 196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이다. 그는 남녀의 농밀한 사랑을 다루는 데 능숙했던, 일본 문학 특유의 감성적 탐미에 대한 궁극을 추구한 소설가다. 당시 수상 평가에는, 섬세한 표현과 서술의 탁월함으로 일본인 심정의 본질을 그린 작가로 소개되어 있다. 이에 호응하듯 그는 기모노를 입고 연단에 서서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주제로 수상 소감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4년 뒤 자살로 짧았던 영광의 시간은 허무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13년 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을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한다.

“채 밝지 않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눈뜨며, 고통스러운 꿈의 여운이 남아 있는 의식을 더듬어 뜨거운 ‘기대’의 감각을 찾아 헤맨다.” ‘설국’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묘사로 시작되는 ‘만엔원년의 풋볼’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겐자부로의 대표작이다. 그는 일본의 전체주의가 평범한 인간을 집단 폭력에 매몰시키는 과정을 그렸다. 당시 수상평에는 현대의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양상을 극명하게 그려낸 작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26년 전 같은 자리에 섰던 야스나리의 이야기에 반박하며, 인간성 말살을 기억하고 속죄하지 않는 ‘애매한 일본의 나’는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문학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30년 뒤 우리가 묻게 될 두가지 질문의 답이 들어 있다. 왜 한강이 노벨상을 받았을까? 문학상이 가치가 있을까?

답 하나. 한강의 작품은 불편하기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올해 노벨상은 놀라운 소식으로 가득했다. 물리학 수상자인 제프리 힌턴은 수많은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심층신경망 연구에 매진한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물리학자가 아닌 컴퓨터 과학자다.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인공지능으로 화학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허사비스는, 우리에겐 이세돌과 바둑 대결을 펼친 알파고 개발자로 더 친숙하다. 그래도 과학 분야의 소식은 최근 인공지능의 약진으로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하지만 카톡으로 날라온 문학상 수상자 소식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참 전에 지난 만우절이었다.

노벨 위원회의 수상자 엠바고는 지독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선정에 참여했던 심사위원의 입을 통해 사후 하마평은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누가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몇년은 들린 후에 수상자로 선정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이번 문학상 결과는 흔한 낌새도 없었다. 일인당 독서량은 일년에 네권이 안되며, 그나마 베스트셀러는 학생 참고서와 수학 문제집이 차지하고 있고, 학생들은 수능 요약서로 문학을 접하고, 성인의 60%는 일년에 책 한권도 안 읽는, ‘문송합니다’라는 자조의 말을 할 사람조차 사라져가는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니, 아무리 무망지복이라도 기대할 염치가 있어야 기쁜 법이다.

노벨상 수상자에겐 상금과 증서 외에 알프레드 노벨의 초상화가 새겨진 금메달이 주어진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노벨 과학상과 문학상, 차이가 뭘까

왜 한강 작가가 문학상을 받았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노벨상이 뭔지 알아야 한다. 노벨상은 매년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그리고 문학, 평화, 경제학 여섯 분야에 수여된다. 여기서 과학 분야는 수상 위원회에서 어떤 주제에 상을 줄 것을 결정하면, 누가 상을 받을지 대강 답이 나온다. 정량적 특성의 과학 분야는, 누구 말처럼 이력을 출력해 선풍기에 날려보면 수상자를 결정할 수 있다. 각 연구 주제별로 논문 개수, 영향력 지수, 피인용 지수 등 정량적 수치를 통해 후보자들이 한 줄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과학은 분야를 막론하고 단독으로 괄목할 성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해 공동 수상이 대부분이다. 경제학상도 마찬가지고, 평화상은 아예 단체에 수여되는 경우가 많다.

노벨 문학상은 다른 분야와 달리 (거의) 개인에게 수여된다. 작가가 구축한 인문학적 세계에 수여되는 문학상의 성격을 모르면, 번역 덕분에 상을 받았다는 엉뚱한 소리가 나온다. 물론 잘된 번역을 통해 심사위원들이 작품 세계를 탐색하게 된다. 따라서 번역도 문학의 한 영역으로, 최고의 영문 번역에 상을 수여하는 맨-부커상이 따로 있다. 그리고 2016년 ‘채식주의자’의 영문 번역판 ‘vegetarian’으로 한강과 데보라 스미스가 수상하였다. 따라서 번역가의 능력과 공로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작품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되는 문학상을 두고, 번역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말과 다름없다.

노벨 문학상은 수상 기준에서도 다른 분야와 차이가 난다. 과학 분야는 자연의 진리라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지식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 사용한 연구비, 투자한 시간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과학은 오히려 사람의 사정이 빠져야 진실에 더 가깝게 접근한다. 하지만 문학상은 그 반대로 사람의 사정이 전부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 감정을 소통하는 인문학 예술이다. 특히 노벨 문학상은 문사철로 통칭되는 인문학 전반에 수여되는 상이다. 문자를 통해 정보를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집단 지성은 크게 과학과 인문학으로 구분된다. 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문학은 사람의 법칙을 ‘발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는 답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에는 답이 없다.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르고, 개인과 집단의 의지가 다르고, 집단 사이의 이익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연결 원리를 찾는 것이 철학, 시대라는 변수를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인간의 사정을 이해하는 기본 데이터가 담겨 있는 것이 문학이다.

과학은 객관식이고 인문학은 주관식이다. 더구나 문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타인의 환경과 행동에 대한 이해를 다룬다. 문학 작품은 공감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다. 베스트셀러에 공감이 안되면 나의 감정이 대중적 공감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게 느낀다고 따지고 설득하려 드는 것은, 짜장면이 아니라 짬뽕을 시켰다고 화를 내는 꼴이다. 문학이란 환경에 대한 사람의 대응을 공연하는 문자 예술이다. 고전이 지루한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읽기 때문이다. 과거의 베스트셀러인 고전은 당시의 시대 배경을 고려해서 읽으면 흥미가 배가된다. 이렇게 문학은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과 교감하는 타임 머신이 된다.

노벨 문학상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관통하는 철학 사조는 실존주의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수상 기준은 조금씩 변했다. 야스나리와 겐자부로의 이야기는 이런 시대 정신 변화를 보여준다. 전쟁이라는 세기말적 참상에 야스나리는 눈을 감고 허무주의로 도피한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라는 피투(Geworfenheit, 彼投)에 운명을 체념한 것이다. 하지만 겐자부로는 피투를 직시하고 운명을 기투(Entwurf, 企投)하는 자유의지를 선택했다. 이차세계대전에서 그는 전선의 경계가 사라진 전면전을 직접 경험하였다. 전쟁터에서 일상인의 감각으로 살고, 일상인은 전쟁터의 감각으로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겪은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가 만들어 내는 집단 폭력의 광기와 선동 뒤에 숨어 이익을 추구하는 혐오의 상인을 고발한다. 이런 측면에서 나찌 파시즘을 분석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문학적으로 투사된 것이 겐자부로의 작품 세계라 할 수 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성의 보편 타당한 마지노선이다. 인류 집단이 지속되려면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간단한 논리를 역사가 가르쳤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에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도그마나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집단주의 관점에서 자기 집단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불편하다. 개인적 불편함이 타인을 향한 강압으로 발현되면, 겐자부로를 비난하는 일본 극우주의, 모옌을 비난하는 중국 홍위병 같은 전체주의가 된다. 인류 역사에서 전체주의는 항상 파멸로 가는 급행열차였다. 노벨상의 관심이 20세기에는 폭력의 주체인 파시즘 같은 거악에 있었다면, 이제는 폭력의 피해자인 개인으로 이동하였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파시즘 몰락, 냉전 종식, 세계화의 물결,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차례로 놓여 있다.

한강의 작품은 다양한 층위의 집단이 개인에 가하는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진은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영정.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강의 노벨문학상이 특별한 이유

현대 문명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하지만 세계화가 일으킨 팬데믹 상황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숙주가 되었다. 방역의 본질은 집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역은 예외없이 적용되지만, 개인이 감당하는 부작용에는 커다란 차이가 난다. 당장 나와 가족이 굶는 상황에서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위한 희생이 강요되는 것이 방역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사정을 고려하면 바이러스가 계속 빠져나갔다. 이처럼 세계화 시대에는 인류, 국가, 마을,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길게 드리워 있는 암울한 기후위기의 그림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21세기의 세계가 겪는 이 딜레마가 한강의 작품에 투사되어 있다.

한강의 작품은 읽기가 불편하고 무섭다. 가족, 전통, 상식, 이념, 도그마, 국가 등 다양한 층위의 집단이 개인에 가하는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에 노출된 개인의 공포와 좌절을 담담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삶에서 악당이 된다. 내가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한강의 작품은 불편하다. 이 불편함이 한강을 차별화한다. 폭력에서 도피한 야스나리에게 눈은, 세상의 더러운 것을 하얗게 덮는 마법의 장치다. 하지만 현실의 눈은 녹기 마련이고, 상처는 더 심각하게 썩은 상태로 드러난다. 한강의 작품에 등장하는 눈은 아픔을 이기고 치워야 할 대상이다. 사라진 혈육을 찾기 위해 시체의 얼굴 위에 내려 앉은 성근 눈을 걷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가스 괴저는 팔다리 상처에 클로스트리디움이라는 세균이 감염되면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세균이 가스를 배출하면 근막 내 압력이 올라가고, 혈관이 눌려 피가 돌지 않아 근육이 썩는다. 이 부작용은 항생제로 우아하게 치료할 수가 없다. 혈액 순환이 안되기 때문에 감염 부위에 항생제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치료를 위해서는 살을 째고, 썩은 감염 부위를 드러내고, 항생제를 직접 들이부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를 벌려놓은 채로 세균이 없어지길 기다리는 환자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불편한 과정을 거치치 않으면 근육이 썩고, 팔다리를 절단하고, 사람이 죽는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처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작가는 사회의 병을 진단하기 위해 상처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노벨 문학상은 현대의 개인이 입은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한강을 선택한 것이다.

노벨상에서 문학만 이렇게 특별 대접을 받는 이유는 바로 노벨 때문이다. 다이너마이트, 전쟁, 살상무기, 벼락 부자, 양심의 가책 등의 키워드로 그의 이야기는 정리가 된다. 요지는 무지성의 과학기술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노벨상 재단의 설립 이유라는 것이다. 이를 반영해 문학상은 시대 정신에 보편 타당한 인간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 기술의 반대쪽에서 노벨상의 균형을 잡는 무게추의 역할을 한다. 이번 과학 분야의 특징은 인공지능의 약진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무지성 발전에 대한 특이점 경고와 우려도 지식사회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또한 틀린 문제에서 배우는 지도학습은 인공지능 개발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여는 인공지능 수상에 대한 절묘한 카운터 웨이트였다.

노벨 과학상이 문명 영역의 상이라면, 문학상은 문화 영역의 상이다. 픽사베이

문명의 힘 대 문화의 힘

답 둘, 우리에겐 노벨 문학상이 훨씬 가치있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인간을 빵 만으로 살수 없는 존재로 정의하였다. 반짝이던 젊음을 인간 존재의 사유에 바친 작가에게, 빵 크기를 들이대는 것은 몰상식한 짓이다. 하지만 과학 분야가 아니면 노벨상의 가치가 없다는 어이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 이야기하면, 문학상이 훨씬 더 큰 빵이다. 과학 분야의 상은 과거의 성과에 대해 후행적으로 주는 상이다. 하지만 문학상은 미래에도 지속되는 문화에 대해 선행적으로 주는 상이다. 그리고 과학상은 다양한 풀뿌리 연구에서 파생된 결과에 대해 주는 상이지, 국가에서 하향식으로 계획을 세워 투자한다고 받는 상이 아니다. 따라서 노벨 과학상은 오롯히 개인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상이다. 하지만 문학상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국가의 문화와 상품에도 부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노벨 과학상이 문명 영역의 상이라면, 문학상은 문화 영역의 상이다. 같은 문(文)자로 시작하지만,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는 완전 다른 단어다. 문명(civilization)은 ‘도시의 세련된 삶’을 의미한다. 과학과 산업 혁명을 거쳐 초격차를 달성한 18세기 유럽 열강은 식민지 쟁탈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식민지와 차별화를 위해 자신들을 문명인으로 자칭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오리엔트(orient)라는 단어도 ’문명의 동쪽‘이라는 멸칭이다. 반면 문화(culture)는 재배한다는 의미의 라틴어에 기원을 둔 나름 유서 깊은 단어다.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양태가 문화다. 그런데 지역과 시대에 따른 환경의 차이는 다양한 문화를 형성한다. 이처럼 문화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다원주의다.

문명과 문화는 비례 관계가 아니다. 문명은 시간의 단면을 잘라서 측정하는 정량적 관점이지만,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동적 변화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 18세기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보다 수준이 높았다는 주장은 참이다. 하지만 서양 문화가 동양 문화보다 수준이 높다는 주장은 애초에 성립 불가다. 이런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혼동하면, 오래전 관짝에 들어간 제국주의 망령이 튀어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미시적 계량 경제와 거시적 역사를 교배시킨 기괴한 혼종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과 속된 말로 ’국뽕‘의 차이점도 여기에 있다. 수치적 계량을 통해 비교가 가능한 문명은 줄세우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다른 문명을 까내리면, 우리 문명이 우월해진다. 하지만 문화는 계량적 비교와 줄세우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른 문화를 까내린다고, 우리 문화가 우월해지지 않는다.

일본의 식민지배, 우리만 불타오른 이념의 대리전, 냉전의 최전선, 우리나라는 유래 없이 압축된 역사의 압력을 버텨내며 근대에서 현대로 도약하였다. 그리고 고도 성장 과정을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우리 문화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한류 드라마가 유행하면 그러다 말겠지, K 팝이 유행하면 그러다 말겠지, 영화가 유행하면 그러다 말겠지, K 컨텐츠가 유행하면 그러다 말겠지, 한식이 유행하면 그러다 말겠지를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노벨 문학상이 우리 문화의 가치를 우리만 몰랐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공산품은 십년의 상품이고, 과학 기술이 백년의 상품이라면, 문화는 천년의 상품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과학기술은 백년의 상품, 문화는 천년의 상품

노벨 문학상에는 언어 장벽이 존재한다. 인도-유럽어족 이외의 언어로 쓰인 작품은 번역 필터링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작품을 먼저 선정하고 번역을 의뢰하는 순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문화 상품에는 이런 탑다운 접근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와 세계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겐 평범한 한글이, 외국인에게는 아름다운 조형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한 발상의 전환으로, 외국에서 먼저 작품을 선택하고 나서 번역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그 초기 성과가 2015년 출판된 한강의 < 영문판이다. 다양한 작품에서 경쟁력이 있는 것의 자연 선택을 유도한 것은, 다양성과 적자생존으로 진행되는 생물 진화와 유사하다. 이는 관료주의가 문화적 다양성을 억누르고 방향을 통제하면 안되는 이유를 잘 보여둔다. 또한 올바른 선택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에 공산품을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경쟁은 개미지옥이다. 기술 수준이 상향 평준화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는 상품에 이야기를 연결해 부가 가치를 추가한다. 명품 지갑에 넣는다고 돈이 불어나지 않는다. 명품 차를 탄다고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반 공산품과 동일한 기능의 명품을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선다. 물질에 이유를 부여하는 문화의 힘 때문이다. 문명이 상품을 만든다면, 문화는 선택을 부채질한다.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빵 만으로도 살 수도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우리가 빵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세계는 우리 문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옷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문화는 사람의 마음에 스며든다. 공산품은 십년의 상품이고, 과학 기술이 백년의 상품이라면, 문화는 천년의 상품이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문화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는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도,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음미하는 것도, 친구와 어울리고 수다를 떠는 것도 문화 생활이다. 소통과 공감으로 어울리는 삶 자체가 문화다. 그런데 소통의 가장 큰 함정은 ’소통했다는 착각‘이다. 소통은 강제가 아니라 이해다. 한강은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다. 예전 산업 고도 성장기에 우리의 유일한 자원은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때 사람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자본을 의미했다. 이제 문화 강국의 인재는 어울려 사는 재미를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뤄낸 문명 발전을 보고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 말하였다. 이제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한강의 기적을 말할 그날이 기대된다.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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