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100년 뒤 보고 설계하되 데이터 투명히 공개해야”[창간 33주년 특집]
‘윤 정부 개혁 이렇게’ 전문가 인터뷰 - <2> 겐조 요시카즈 日게이오대 교수
“눈치만 보다가 끝내 뒤로 미루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능의 역사’만 남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첫째 100년 뒤를 바라보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관료의 능력, 둘째 당장의 근시안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지도자의 의지, 셋째 전문적이며 투명하게 공개된 데이터가 성공적인 개혁의 필수조건입니다.”
겐조 요시카즈(權丈善一) 일본 게이오대 상학부 교수는 지난달 23일 일본 도쿄(東京) 아세아대학에서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윤석열 정부의 연금·의료·교육·노동 개혁과 저출생 문제 해결 등 ‘4+1 개혁’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을 강조했다.
겐조 교수는 2004년 일본의 연금개혁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본 공적연금 학계의 ‘대부’다. 그 이후로도 그는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사회보장심의회 연금부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보장 제도의 안정성·신뢰성 확보를 위해 주력해왔다. 겐조 교수는 오늘날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 연금개혁 과정에 대해 “언젠가는,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며 “전 세계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본 연금개혁의 선례를 한국도 만들어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전문적·투명한 데이터
연금·의료·노동·교육 개혁 등
전문가委서 데이터 산출하고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해야
日선 연금조정 따라 경제 분석
한국서도 이런 자료 만들어야
―일본은 2004년 후생연금(한국의 국민연금)을 대폭 개혁했다. 100년 뒤를 대비한 개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주안점은 어디에 있었나.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다. 과거엔 보험료율이 올라가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연금도 늘어나는 구조였다. 하지만 1985년 이후로는 보험료율이 올라도 연금은 오히려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 즉 ‘더 내고 덜 받는’ 구조가 불가피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했다. 당시 일본의 보험료율은 13.58%였다. 계산해보니 2030년까지 22.8%로 올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센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가파른 인상률이었다. 이에 노동계, 고용계, 정치권에서 18.3%를 보험료율 상한으로 두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소득대체율(가입 기간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 하한선을 60%에서 50%로 끌어내렸다.”
―세계 각국의 연금개혁 사례에서 얻은 교훈이나 힌트가 있었나.
“2000년대 들어 세계 각국의 연금을 많이 연구했는데, 스웨덴과 이탈리아에서 거시경제적인 움직임에 맞춰 연금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이에 착안해 일본도 2004년 연금개혁에서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도입했다. 그 전까지는 개인의 임금이 올라가면 보험료율이 늘어나고, 결국엔 받을 수 있는 연금도 늘어난다는 단순한 논리에 입각해 계산해왔다. 하지만 거시경제 슬라이드 도입 이후로는 한 개인이 아닌 전체 인구의 총임금을 고려해 연금을 생각하는 구조로 전환됐다. 독일도 비슷한 시기에 거시경제를 고려하는 연금 정책을 낸 것으로 안다.”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연금 5만 엔을 받는 A 씨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A 씨의 임금이 10% 오르면 옛 제도 하에선 연금 수령액도 5만5000엔으로 오른다. 그런데 노동자 수가 줄고 고령자(연금 수령자)가 늘면서 오른 임금만큼 연금 지급액을 늘리기 어려워진 거다.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전체 경제 상황, 고용 사정을 분석해 연금 지급액을 자동으로 조절한다. 거시경제에 따라 A 씨는 5만5000엔이 아닌 5만2000엔이나 5만3000엔 정도만 받게 될 수 있다. 이때, 한국에 조언하고 싶은 부분은 ‘디플레이션이 일어났을 땐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작동시키지 않겠다’고 한 일본의 선례를 따르지 말라는 거다. 앞으로 물가와 실질임금이 어떻게 변동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도입된 지 11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발동될 수 있었다. 2004년의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물가, 임금이 모두 긍정적인 경우에만 발동할 뿐, 임금과 물가 수준이 좋지 않은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실질적으로 거시경제 슬라이드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100년을 보는 관료의 능력
개혁 우선 순위는 지속가능성
미래 100년 내다보고 추진해야
지속적 토론회 통해 국민 설득
연금의 경우 국고 부담 늘려야
獨·英도 적립금 2·4개월치뿐
―일본 내 반대 여론이 거셌을 텐데.
“중의원 단계에선 순조롭게 논의됐지만, 참의원 단계에서는 굉장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당시 고위관료들의 연금 미납 스캔들이 터져서 ‘연금 불신’ 여론이 생겼기 때문이다. 야당은 이에 편승해 반대 여론을 부추겼다.”
겐조 교수가 언급한 스캔들은 2004년 일본 정계를 강타한 ‘연금 스캔들’이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의 이인자 격이었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재무상,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재정금융상,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무상,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방위상 등이 국민연금 납부 의무를 지키지 않은 사실이 발각됐다. 고이즈미 정부가 연금개혁 법안을 추진하고 있던 터라 일본 여론은 더욱 싸늘했다. 실제로 2004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고이즈미 내각은 패배했다.
―지금도 일본은 5년마다 연금 제도를 조정하고 있다. 그때마다 여론은 어떤가.
“보험료율을 매년 0.35%포인트씩 올려왔으니 국민들은 반대한다. 하지만 법에 따라 꼭 해야만 하는 절차다. 반대 여론이 있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 정부도 연금개혁을 매듭 짓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한국의 언론은 ‘국민연금 적립금이 조만간 고갈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도한다. 하지만 미래 100년을 봤을 때 적립금이 연금의 재정안정성에 기여하는 비율은 10% 남짓이다. 해외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적립금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상태고, 독일은 연금 지급분의 2개월 치뿐이다. 영국은 4개월 치, 미국은 3년 치, 일본은 4년 치 정도다. 적립금으로는 더 이상 연금이 운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에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관료들의 능력과 정치 지도자의 의지, 데이터의 투명한 공개가 성패를 가른다. 관료들은 보험료율이 9%로 유지되면 어떻게 되는지, 13%로 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등 다양한 경제 상황을 가정해서 데이터를 산출하고 국민 누구나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시화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계산이 객관적인 전문가 위원회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료를 국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해 인터넷상에서, 동네 커뮤니티에서 다채로운 토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데이터를 본 적이 없다. 일본 연금개혁 전문가들이 한국에 파견된다면 2개월이면 거뜬히 만들 수 있는 자료다(웃음). 데이터는 연금개혁 논의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일본이 2004년 연금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관료들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시민 집회에 직접 참여해 시민들과 토론하고, 대학에서 설명회를 열고,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미래 준비하는 지도자 의지
개혁은 누군가 언젠가는 할 일
근시안적 반대 딛고 미래 대비
뒤로 미루면 ‘무능의 역사’뿐
연금 ‘거시경제 슬라이드’ 도입
개인 아닌 인구 총임금 고려를
―모수 조정을 하자는 야당과 자동 안정 장치 도입 등 구조를 함께 개혁해야 한다는 여당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자동 안정 장치를 도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자동’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자동 안정 장치를 도입하면 국민의 노후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공적연금이 인구 변화나 경제 변화에 대해 ‘자동’, 즉 정치 과정과는 독립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 정치의 움직임은 일본을 비롯해 모든 나라가 불안정하다. 그러한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정치로부터 해방된 공적연금 보험을 갖는 것이 국민의 노후 생활을 지키는 데 더 도움이 된다.”
―고령자가 증가하고 노동 인구가 감소하면서 한국, 일본 양국 모두 고령자의 기준을 높이자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 연금개혁 논의와 정년 연장은 동시에 논의되어야 하나.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도입하면 연금 지급 개시 연령 문제는 사라진다. 일본은 현재 60세부터 75세까지 수급 개시 연령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거시경제 슬라이드와 같은 급여의 자동 조정 체계를 도입해 연금은 연금, 정년을 포함한 고용은 고용의 문제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내고 덜 받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연금은 세대 간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공적연금 제도 가입을 선택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 선택지는 고려해선 안 된다. 선택하는 당사자들의 판단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며, 젊을 때는 공적연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적연금은 강제 가입으로 유지해야 한다. 공적연금은 오래 사는 위험성에 대한 보험, 즉 공적연금 보험이다. 죽을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종신연금 보험의 의미는 매우 크다. 물론, 공적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는 것이 개인의 장래에 이득이 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막대한 국고 부담이 필요하다. 일본도 전체 급여의 2분의 1을 국고로 부담한다. 연금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이 국고 부담분도 받을 수 없는 구조다. 국민연금의 보험료를 내지 않는 것보다, 보험료를 납부하고 국고 부담분을 받는 것이 유리하도록 만든 것이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공적연금의 장기적 추정을 하고, 공적연금의 역할과 의미를 국민에게 확실히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금과 인구 문제는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한국도 합계출산율이 약 0.6명에 불과한 것을 포함해 여러 저출생 문제를 안고 있다. 연금개혁과 인구개혁 논의는 어떻게 연결지어야 하는가.
“공적연금에 있어 인구는 주어진 조건으로 다루는 것이 좋다. 연금개혁과 인구개혁을 연결시키면, 연금을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느냐는 반발이 생길 수 있다. 연금에 있어 인구는 어디까지나 주어진 조건으로 다루고, 연금은 연금대로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아동 및 육아 지원 정책은 별도의 관점에서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 일본은 올해 아동 및 육아 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재원(총 3조6000억 엔)을 확보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재원이 연금이나 재정을 지탱할 사람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연금과 별개로, 아동 및 육아 지원은 아이와 그 가족의 행복을 위한 정책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저출생이 멈추고 출산율이 상승하면 공적연금 보험의 재정이 건전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동 및 육아 지원은 아이와 그 가족의 삶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지, 연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1962년 출생 △게이오대 상학부 졸업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방문연구원 △게이오대 상학부 조교수 △게이오대 상학부 교수 △케임브리지대 다우닝 칼리지 방문연구원 △일본 사회보장심의회 연금부 위원 △일본 사회보장국민회의 위원 △일본 사회보장제도 개혁국민회의 위원 △일본 사회보장제도 개혁추진회의 위원
글·사진 = 권승현 기자 ktop@munhwa.com
■ 용어 설명
거시경제 슬라이드 = 일본이 2004년 전격 단행한 연금개혁의 핵심으로, 보험료 수준과 국고 부담을 고정하면서도 재정 균형을 도모할 수 있도록 급여 수준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장치다. 도입 이전에는 임금 및 물가 상승분을 매년 반영해 지급액을 인상하는 구조였다. 일본은 100년에 걸친 연금재정 안정화를 위해 이 제도를 도입, 저출생에 따른 가입자 수 감소와 기대여명 연장이라는 사회·거시경제적 변화를 반영해 급여 수준을 조정할 수 있게 했다. 급여 수준을 자동으로 조정하더라도 소득대체율은 50% 이상을 확보하도록 규정했다. 다만, 디플레이션 등 예상치 못한 경제 상황이 지속되면서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도입 후 2014년까지 10년간 작동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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