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 자란 아이들은 길들여진다...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윤리적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한국어 판 제목)은 '노트북 삼부작'(The Notebook Trilogy)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 세 작품은 ‘비밀 수첩'(Le Grand Cahier·1986), ‘타인의 증거'(La Preuve· 1988), ‘50년간의 고독’(Le Troisième Mensonge·1991)이다. 이 작품들은 각각 2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작품으로 읽힌다. 처음 한 권으로 묶어낸 곳은 미국이었고, 10년쯤 지난 뒤 프랑스에서도 한 권으로 묶었는데, 제목은 ‘쌍둥이 삼부작'(La Trilogie des Jumeaux)이었다. 미국의 제목은 ‘기록’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고, 프랑스는 ‘쌍둥이’에게, 한국은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용했다. 작품을 읽기 전에는 꽤 다른 제목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완독하고 나면 모두 비슷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어떤 형식의 기록이든 그것은 기억으로 재구성한 사실과 쌍둥이 같은 것이다. 모든 쌍둥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기록은 언어화되는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한다. 경험 그대로 기억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기억을 그대로 기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기록과 해석이라는 쌍둥이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하기도 한다. 현재의 ‘존재’는 과거의 기록에 의해 규정되지만 어떤 존재든 현재와 과거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달라진 존재는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해석된 존재는 기록의 쌍둥이이지만 기록 그 자체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록은 존재에 대한 거짓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쌍둥이가 전쟁에 적응하는 방식, 폭력
이런 주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세 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1부인 ‘비밀 수첩’의 원래 제목은 ‘커다란 노트’다. 끔찍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응하는 ‘우리, 쌍둥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쌍둥이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것인데, 근친상간, 폭력, 동성애, 수간이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쓰여 있다. 그 결과 ‘경악스러울 정도로 대담한 묘사’가 난무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믿기 힘들 정도의 내용이 ‘우리’에게는 진실임을 분명히 한다. 쌍둥이들은 각자가 쓴 것을 읽어보고 ‘진실하게 쓴 것’만 커다란 노트에 옮겨 적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실을 언어화하는 방식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쌍둥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폭격을 당해 처참하게 죽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배에서는 창자가 터져나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아기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머리는 폭탄으로 팬 구덩이 속에 늘어져 있었다. 두 눈을 뜬 채 아직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너무 건조해서 감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은 문장이라 더욱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은 내용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다. 고아나 다를 바 없는 ‘우리’가 전쟁에 적응하며 살아내던 어느 날 감옥에 갔던 아버지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지역을 잘 아는 아들에게 국경을 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쌍둥이가 안내한다. 마지막 관문은 지뢰밭인데 그곳을 안전하게 건너는 방법은 누군가를 앞서 걷게 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앞서 걷게 하고 지뢰가 폭발해 죽자 그 시체를 밟고 둘 중 하나가 국경을 넘는다.
공문서에는 존재하지 않는 두 사람
제2부의 제목은 ‘타인의 증거’다. 여기에는 1부의 ‘우리’처럼 이름 없는 화자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간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와 함께 살던 곳에 남은 쌍둥이 형제인 루카스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루카스의 관점에서 쓰인다. 그는 클라우스가 떠난 뒤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가장 극단적인 관계는 자발적으로 근친상간을 저지른 야스민과 함께 기거하는 것이다. 야스민은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숨기려다 장애를 지닌 아이를 낳는다.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아이를 강물에 던지려던 야스민은 루카스에게 발견돼 도움을 받는다. 루카스는 도와주려고만 했다지만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에서는 어떤 관계라 해도 섹스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루카스는 야스민의 아이 마티아스를 자기 아이처럼 키운다. 그러면서 동시에 또 다른 나이 많은 여자를 사랑한다. 이야기의 결말은 오리무중이다. 야스민은 아이를 남기고 대도시로 떠났다고 하지만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됐고, 깊은 애정을 바쳐 키운 아이는 장애인이라는 운명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이후 루카스는 사라져버린다. 참고로 야스민은 순수와 아름다움의 상징인 자스민 꽃이고 마티아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쌍둥이 클라우스가 삼십 년 만에 루카스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모두가 클라우스가 루카스인 줄 안다. 클라우스는 헤어진 쌍둥이 형제라고 밝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클라우스는 사라진 루카스가 남긴 ‘기록’을 존재의 증거로 받아들이지만 공문서에는 그들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진다.
비도덕이지만 가장 순수한 윤리적 태도
제3부의 제목은 ‘50년간의 고독’(원작의 제목은 ‘세 번째 거짓말’)이다. 여기에는 클라우스 루카스라는 시인이 등장한다. 그는 한 출판사에서 경영하는 인쇄소의 사장이다. 1부와 2부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 모두 상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에피소드들은 시공을 넘나들며 뒤섞여 있다.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고문실이 있는 병원과 재활원에서 악마 같은 짓을 하던 클라우스가 등장하고 자신이 루카스의 쌍둥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자신도 자기 주장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인물과의 대화에도 이런 의문이 드러난다. ‘너는 클라우스니 아니면 루카스니?’ 전쟁 중에 폭격으로 죽었다는 엄마가 등장해서 자신이 루카스를 죽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루카스를 만난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가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오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나를 지켜야 한다.’
3부에는 클라우스 루카스라는 이름의 한 인물이 등장할 뿐 아니라 쌍둥이인 클라우스와 루카스가 헤어진 뒤 겪은 서로 다른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누가 클라우스이고 누가 루카스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작가도 그랬을지 모른다. 텍스트만으로는 정체가 애매한 경우도 많다. 그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한 인간이 아닌가. 다른 얼굴의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기도 한 쌍둥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을 자신의 인생을 바꿀 만큼 중요한 작품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찬사를 보냈다. "철학자로서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가 이 안에 있다." 이런 평가는 쌍둥이 소년이 보여주는 순수하고 조건 없는 윤리적 태도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들은 전쟁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면 거짓말하고, 협박하고, 살인도 하지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장애가 있거나 가난한 사람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 최선을 다해 돕는다. 그것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쌍둥이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 상징성은 클라우스와 루카스라는 이름에 담겨 있기도 하다. 클라우스는 전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고 루카스는 희망의 빛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문체에 대한 것이다. 1부의 화자는 조숙한 소년의 간결하고 냉소적인 어투를 사용한다. 그것은 헝가리 출신의 작가가 ‘아직 프랑스어에 능숙하지 못했던 시절’에 썼기 때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프랑스어에 익숙해진 뒤에 쓴 2부와 3부는 세련된 언어 감각을 보여준다. 미묘한 뉘앙스에 깊은 의미를 담아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절대적 영원성의 차원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작가의 철학적 깊이일 것이다.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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