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통화녹취에 어른거리는 ‘최순실 태블릿PC’…‘출구’ 못 찾는 용산
‘임기반환점’ 尹, 개각으로 국정 쇄신 시도…보건복지부·교육부 장관 교체 검토
(시사저널=박나영 기자)
"김영선이를 좀 해줘라."
물이 넘치기 전 마지막 한 방울일까. 10월31일 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명태균 녹취록'에 담긴 윤석열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그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방송 전파를 타고 반복 재생되기 시작한 윤 대통령의 육성, 그 대화 내용과 뉘앙스를 똑똑히 들은 국민이 어떤 판단과 결심을 하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엄중한 상황이다. 대선 경선 후에는 윤 대통령이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와 문자 또는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했던 대통령실의 해명이 거짓인 게 드러나면서 용산의 '신뢰'는 추락하고 있다. 반면 '김건희 여사에게 김영선 전 의원의 공천을 받아냈다'는 명씨의 주장은 윤 대통령의 통화 녹취로 또 하나의 퍼즐이 맞춰진 모양새다.
언론에 '명태균'이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하며 '김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여론조사 조작 의혹' 등이 불거진 지 두어 달 만에 윤 대통령은 대위기를 맞았다. 연일 이어진 폭로 속에 정치권과 여론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 것은 공천 관련 대화가 담긴 윤 대통령이나 김 여사의 통화 녹취록이 존재하는지 여부였다. 특히 윤 대통령의 음성이 담긴 녹취록은 '김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을 밝혀줄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인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트리거'(방아쇠)가 될 가능성이 제기돼 왔다. "잡아넣을 건지 말 건지, 한 달이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되겠나"(10월7일 인터뷰), "내가 들어가면 한 달 만에 이 정권이 무너지겠지"(10월8일 인터뷰). 명씨는 '탄핵'과 '하야' 등을 언급하며 검찰이 자신을 구속하면 대선 때 했던 일들을 폭로할 것이고, 그러면 한 달 안에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자신해 오던 터다.
尹 벼랑 내몬 한마디 "김영선이를 좀 해줘라"
'제2의 태블릿PC'가 되는 걸까. 윤 대통령의 통화 녹취는 국민 눈에 2016년 탄핵의 트리거가 됐던 '태블릿 PC'와 겹쳐 보이는 상황이다. 녹취대로라면,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정당 공천에 개입한 정황을 입증하는 것으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대통령실은 즉각 언론 공지를 통해 "당시 윤석열 당선인은 공천을 지시한 적 없다"며 선을 그었다. "명씨가 김영선 후보 공천을 계속 이야기하니까 그저 좋게 이야기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혹이 터질 때마다 기계적으로 내놓은 대통령실의 '사실관계 없음' 해명만으로 해당 논란을 무마하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당초 윤 대통령은 11월10일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성 담긴 사과로 민심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 핵심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통령실은 지난 임기 동안 민심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윤 대통령이 사과하면서 김 여사의 대외활동 자제를 약속하고, 보건복지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 교체 등 국정 쇄신을 위한 개각을 단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 여권 핵심 관계자는 "김 여사와 관련한 사과는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식이 아니라 국민 눈높이에 맞춰 민심을 헤아리지 못한 점, 공적인 문제를 사적인 것과 연결시켰던 부분에 대한 사과로서 최대한 진정성을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녹취가 공개되기 전까지의 전략이었다. 이 정도 조치는 윤 대통령의 방어막이 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8년 전 JTBC가 '태블릿PC'를 보도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꺼내며 정국을 돌파해 나가려 했지만 이미 흐르기 시작한 탄핵의 강을 막지는 못했다. 추가로 녹취 공개나 폭로가 이어질 경우 벼랑 끝에 몰린 윤 대통령이 난국을 돌파할 타개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촉각이 쏠린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이미 정치·경제·안보 모든 면에서 사면초가에 놓여 있다.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할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집권여당 대표가 지지율 하락 원인으로 지목되는 '김건희 여사 문제'를 짚고 가자며 '용산'에 정면으로 맞선 상황이다. 여기에 오세훈 서울시장 등 여권 중진들까지 윤 대통령에게 "결자해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밖에서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조국혁신당에 합세해 민주당까지 탄핵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57조원에 이어 올해도 30조원에 이르는 세수 결손이 발생하면서 경기 악화에 안일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원망이 끓어오르고 있는 데다,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 제공을 넘어 파병까지 감행하면서 국가안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김건희 주도, 윤석열 실행'…드러난 공천 개입 의혹
"여러 힘든 상황이 있지만 업보로 생각하고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윤 대통령이 최근 정국 타개책으로 내놓은 답변은 국민을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대통령실은 '흔들림 없이 개혁 과제를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지만, 국민 머릿속엔 그간 충분한 소통 없이 밀어붙인 개혁과제들과 협상과 설득의 부재로 이어진 대치 정국만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윤 대통령 특유의 마이웨이 기질과 고집이 더 부각될 여지도 있다. 김 여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대표가 요구한 대통령실 인적 쇄신, 대외활동 중단, 의혹 해소를 모두 거부한 윤 대통령이 '김 여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돌이라도 맞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공개된 윤 대통령과 명씨의 통화녹취는 벼랑 끝에 서있던 윤 대통령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 민주당이 확보한 이들 녹취에는 현 정권의 '공천 뒷거래' 정황이 고스란히 담겼다. 민주당에 따르면, 해당 녹취는 윤 대통령이 2022년 6·1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5월9일 명씨와 했던 통화내용이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재보선에서 경남 창원의창에 공천돼 당선됐고, 공천 과정에 명씨와 김 여사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줄곧 제기돼 왔다. 통화녹취를 보면, 윤 대통령은 명씨에게 "공관위에서 나한테 들고 왔길래 내가 김영선이 경선 때부터 열심히 뛰었으니까 그거는 김영선이를 좀 해줘라 그랬는데 말이 많네 당에서"라고 말했다. 이 말 뒤에 명씨는 "진짜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민주당이 입수한 다른 녹취에는 윤 대통령의 불법 공천 의혹이 김 여사에 의한 것이라는 믿기 힘든 정황도 있다. 해당 녹취에서 명씨는 지인에게 윤 대통령 바로 옆에 김 여사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또 윤 대통령이 자신과 대화한 이후 김 여사에게 "됐지"라고 말했고, 윤 대통령과 통화를 마친 후 김 여사가 명씨에게 전화를 해서 "선생님 윤상현에게 전화했습니다. 보안 유지하시고 내일 취임식에 꼭 오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윤 의원은 재보선 공천관리위원장이었고, '내일'(2022년 5월10일)은 윤 대통령 취임식이었다.
더 충격적인 점은 해당 녹취에서 느껴지는 '업무적 상하관계'다. 통화는 명씨와 대통령 사이에 이뤄졌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윤 대통령이 김 여사에게 '보고'를 하는 듯한 뉘앙스가 감지된다. 녹취록은 이렇다.
"지 마누라가 옆에서 '아니 오빠, 명 선생 일 그거 처리 안 했어? 명 선생님 이렇게 아침에 어, 이래 놀라셔 가지고 전화 오게끔 만드는 게, 이게 오빠 이거 오빠, 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 그리고 처음에 뭣이 말이 많은지. '나는 했다, 나는 분명히 했다'라고 마누라 보고 얘기하는 거야. '그 장관 앉혀 뭐 앉혀'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거 앉혀라, 저거 앉혀라' 안 한 거야. 그리고 마누라 앞에서 했다고 변명하는 거야. 내가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했는데 '알았어. 내가 됐지?' 지 마누라한테 그 말이야. 마누라가 또 옆에서, 그리고 바로 끊자마자 지 마누라한테 전화 왔어. '선생님 윤상현이한테 전화했습니다. 보안 유지하시고, 내일 취임식에 꼭 오십시오.' 이러고 전화 끊은 거야."
민주당은 해당 녹취가 윤 대통령이 공천에 개입했고, 공천 뒷거래가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자 헌정 질서를 흔드는 위중한 사안임을 입증하는 물증이라고 보고 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녹취를 공개하며 "여권 일각에서 김건희 여사의 사과와 활동 자제, 특감 임명 따위로 꼬리 자르기 시도하지만 이는 명백히 불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윤석열 정권에 국정은 없고, 국정농단만 가득했다"고 비판했다.
용산과 대치 중인 韓…1차 대전은 '특감 의원총회'
윤 대통령의 녹취록 공개에 국민의힘은 초상집처럼 얼어붙었다. 겉으로는 공식 반응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10월31일 오전 특별감찰관 논의를 위해 모인 중진들의 비공개 회의에서도 '명태균 녹취록' 관련 얘기는 짧게 언급만 된 것으로 전해졌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여당의 무반응에 "꼭 탄핵 전야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페이스북 올린 글에서 그는 "구속되기 싫어서 제멋대로 지껄이는 선거 브로커 하나가 나라를 휘젓고 있고 야당은 이에 맞춰 대통령 공격에만 집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항하는 여당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당 지도부를 향해 "내부 권력투쟁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중진 의원들 사이에 특별감찰관 임명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원이 상당수 있었지만 몇몇 의원은 아직 '용산'의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며 찬성 의견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회의에 참석한 한 의원은 "표대결까지 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데는 중진들 모두 공감했다. 의원총회 전에 한동훈 대표와 추경호 원내대표 사이에 의견일치를 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표대결까지 갈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11월초로 예정된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는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김 여사를 감찰할 특별감찰관 추진에 대한 한 대표의 의지는 확고하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한 대표는 의원총회에 참석해 특별감찰관 임명의 필요성을 피력할 것으로 보인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의총에서 토론의 방향이 특별감찰관 반대쪽으로 흘러간다면 한 대표가 의사진행 발언을 해서라도 토론을 원하는 쪽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대표 입장에서는 '용산'과 헤어질 결심 후 '1차 대전'이 될 의원총회를 뚫어야 다음 플랜을 전개할 수 있는 셈이다.
'낮윤밤한'. 최근 국민의힘 의원들 사이에서 도는 우스갯소리로, 현재 여당 내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친윤(친윤석열)계'로 통하던 의원들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친한(친한동훈)계' 색을 띤다는 것인데, '용산'에 대한 문제의식과 특별감찰관 필요성 등 한 대표의 생각에 공감하는 의원이 늘어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중립지대에 머물던 국민의힘 의원들이 점차 생각을 달리한다면, 그 자체로 윤 대통령에게는 위기일 수밖에 없다. 윤석열이란 배를 띄웠던 민심의 바다는 지금 성난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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