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글과 팔리는 글 사이···미지근해진 욕망[책과 삶]
‘팔리는 형태’로 한없이 바뀌는 글
아찔하게 웃기지만 뒷맛 씁쓸한
작가 지망생들의 ‘창작 분투기’
맨투맨
최재영 지음 |민음사|224쪽 |1만5000원
“아무리 무언가를 써도 그게 읽히지 않는다면, 상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쓰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 이곳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젊음과 청춘을 갉아먹을 뿐인, 예술가도 예술 산업 종사자도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사그라드는 그런 이들. 알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세월을 멋대로 짐작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 우습고, 또 서글펐다.”
최재영 작가의 장편소설 <맨투맨>은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창작을 해나가는 과정, ‘읽히기 위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창작물을 끊임없이 ‘변형’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창작자의 고유한 욕망에서 출발했던 이야기는 어느새 시대적 분위기나 불특정 독자들의 흥미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정된다. 소설은 자조와 해학의 유머로 오늘날 창작자가 놓인 위치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30대 중반의 영호는 아직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시나리오 작가다. ‘맨투맨’은 영호가 3년 전에 쓴 장편 상업영화 시나리오다. 체격과 근력이 특출난 열아홉 살 여고생 송초롱이 눈에 띄는 외모로 주눅 들어 살다가 우연히 종합격투기(UFC)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일약 스타가 된다는 이야기다. ‘맨투맨’은 한때 ‘통할 것 같다’라며 주변 프로듀서 등의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팔리기 위해 쓰인 모든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듯” 투자를 받기 위해 몇 번의 피드백과 수정을 거듭하면서 “너덜너덜해진다”.
그러던 어느날, 영호는 애써 잊고 지냈던 ‘맨투맨’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시나리오 작가 ‘혜진’이 각색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계속되는 실패로 무기력에 빠져 있던 둘은 ‘맨투맨’을 앞에 두고 의기투합한다. 잘 써서, 팔아보자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가치, 진짜로 가치 있는 가치를 한번 만들어보자며. 과연 ‘맨투맨’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을까.
소설은 글을 쓰는 행위가 직면한 모순과 이를 강화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그려낸다. 자신의 고유함을 표현하기 위해 시작했던 글쓰기는 어느 순간 인정에 대한 욕망에 되먹히는 상황으로 변한다. 인정 욕망은 20대에는 “세상의 모든 불행에 통달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특별해지고 싶다는 발버둥”으로 드러났다면, 30대에는 미움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열망으로 나타난다.
‘맨투맨’은 “주인공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된 작품이었다. 애초에 영호는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영화 <록키> 같은 작품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영호는 동시에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난 시대에 이미 다 죽었다”는 것도 안다. ‘맨투맨’은 <록키> 같은 작품을 쓰고 싶은 영호 자신의 욕망에 MMA 격투기, 여고생, 여성 스포츠 등 시의성을 띠는 소재들을 기계적으로 배치한 ‘혼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이지 않기 위해 했던 영호의 선택에는 “주인공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타기층이 불분명하다는 시장의 평가가 돌아온다. 한편 ‘맨투맨’은 창작물에 여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면 가산점을 주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제도로 지원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으로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여자 배우 한 명만 있으면 안 된다며, ‘남녀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수정 요구를 받기도 한다.
안세진 문학평론가는 책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영호의 글은 그러한 애매한 태도 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미지근한 욕망”이면서 “절묘한 균형”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뉴 할리우드 시네마와 2020년대의 페미니즘 시네마 사이에서. 어린 그를 사로잡았던 좋음과 지금-여기에서 분명해진 나쁨 사이에서. 초롱이 주변에 다른 캐릭터를 넣어서 러브 라인을 삽입하라는 시장의 요구와 창작물에 여성이 자유 등장인물로 등장하면 가산점을 주겠다는 영진위의 제도 사이에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화자인 영호가 풀어놓는 자조와 해학의 유머는 아찔할 만큼 재미있고 웃기다. 그러나 “성공한 코미디는 웃기고 훌륭한 코미디는 슬프다”라며 소설가 정용준이 추천사에 쓴 말처럼 자조의 뒷맛은 씁쓸함을 남긴다. 현실에는 영호의 자조가 담아내지 못한 창작의 무수한 가능성과 갈래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소설에서 극대화된 자조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콘텐츠가 창작되고 소비되는 오늘날, 창작자가 처한 위치에 대해 오래 곱씹어볼 만한 질문들을 던진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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