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타타라타] 안병훈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

2024. 11. 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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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별아의 치유산행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위 이미지는 소설 ‘미실’의 작가 김별아가 쓴 치유산행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2011년)의 표지다.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우리네를 위로하는 책이 택한 제목이 다윗의 반지, 솔로몬의 지혜로 유명한 ‘This, Too, Shall Pass Away’인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말은 유대교의 경전해석서(혹은 방법)인 미드라시의 일화에서 비롯됐다. 다윗 왕은 당대 최고의 반지를 하나 제작하고, 여기에 들어갈 최고의 문구를 가져오라고 한 신하에게 지시했다. 고민하던 신하는 지혜롭기로 유명한 왕자 솔로몬에게 찾아가 이 말을 얻었다고 한다.

# 국내 스포츠계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처음 접한 것은 2010년 피겨여왕 김연아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좌우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였다. ‘까방권’이 붙을 정도로 지금도 국민영웅인 김연아는 그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며, 또 세계 정상에 섰을 때도 이 말을 되새겼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어 눈물이 절로 날 때, 거꾸로 환희에 넘쳐 마치 이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은 순간에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떠올리며 힘을 내거나, 적절히 기뻐하는 지혜. 말이 쉽지 최악(혹은 최고)의 순간 이를 떠올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 며칠 전(10월 27일) 이 말을 한 메이저 골프대회에서 다시 들었다. 세계 최고의 장타자 중 한 명이고, 9년여 동안 우승이 없던 33살의 안병훈이 고국에서 열린 DP월드 투어(유러피언투어) 제네시스챔피언십에서 우승하자, 그의 아버지 안재형 전 KTTL(한국프로탁구리그)위원장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드라마 같은 우승이었다. 아주 재미있었고, 이렇게 우승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다. 그러나 우승의 기쁨은 잠시이고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다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지난 27일 제네시스챔피언십 우승 직후의 안변훈 가족. 왼쪽부터 아버지 안재형, 안병훈, 어머니 자오즈민. [사진=안재형 제공]

# 따지고 보면 안병훈만큼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새기며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는 스포츠스타도 없는 것 같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병훈은 어린 시절 신경계통 질환을 앓았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골프를 포기하지 않았고, 당장의 성적보다 골프를 삶의 일부로 즐긴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꾸준한 치료와 몸관리로 이미 수년전 전문의로부터 완치판정을 받아 병마 극복에 성공했다.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들도 자칫하면 성적부진으로 사라지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 프로골프의 세계였으니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 골퍼 안병훈의 성적도 고난극복기 그 자체다. 한국과 미국의 주니어무대에서 빅 벤(안병훈의 별명, 영어이름이 벤자민)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그런데 정말 자고 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처럼 2009년 아마추어 최고 권위의 대회인 US아마추어골프챔피언십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안병훈은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UC버클리를 다니다 프로선언(2011년)을 했지만 PGA는커녕 2부투어도 뛸 수 없어 유럽 2부투어로 향했다. 2012년부터 3년 동안 유럽의 작은 마을은 물론 한국사람들은 도시 이름도 잘 모르는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을 전전하며 투어경험을 쌓았다. 주위에서는 “잠깐 반짝했던 것이지, 이제 안병훈은 안 된다.”고 기대를 내려놓았다. 이 고난의 시간은 자신의 탁구캐리어를 포기하고 골프대디로 나선 아버지 안재형도 함께 했다. 부자(父子)는 인내심을 제대로 배웠다.

# 안병훈은 2015년 화려하게 부활했다. 성적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유럽 1부투어로 올라섰고, 마침내 DP월드투어의 플래그십대회(주요대회)인 BMW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선 것이다. 같은 해 한국을 방문해 KPGA투어 신한동해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보너스였다. 세계랭킹을 바탕으로 안병훈은 PGA투어까지 진출하게 됐다. 그리고 2020년까지 우승은 없지만 PGA투어에서 꾸준한 성적을 냈다.

# 프로선수로 두 번째 고난은 2020~2021시즌이었다. 상금순위가 120위권 밖으로 밀리며 1부투어 카드를 잃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2020년 말 시도한 스위교정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안병훈은 2020년말 스윙코치로 숀 폴리를 영입하면서 스윙교정에 착수했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투어에서 더 오래,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보다 멀리치고, 일관성이 높은 스윙으로 바꿔야 한다.” 현실은 냉혹해서 결국 상금순위가 120권 밖으로 밀리며 1부투어 카드를 잃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 2부투어로 내려간 선수가 다시 1부투어로 올라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이다.

안병훈이 페이스북에 올린 가족 사진. 동갑내기 아내 최희재 씨와 아들 선우(4), 딸 지우(1). [사진=페이스북]

# 그런데 안병훈은 묵묵히 자신만의 스윙만들기를 시도하며 묵묵히 훈련했다. 그리고 콘페리 투어에서 3번째 출전 만에 우승하는 등 빼어난 시즌을 보내며 1년 만에 1부투어 카드를 다시 획득했다. “누구나 슬럼프는 오고, 안 좋은 시기가 온다. 1년 동안 골프가 안 돼 속이 많이 상하고, 스윙을 바꾸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착실하게 준비하면 반드시 바닥을 치고 올라갈 것이라 믿었다.” 안병훈은 또 한 번 고난의 늪을 헤쳐나왔다. 그리고 1부 투어로 복귀한 2024시즌 안병훈은 PGA 우승은 없지만, 투어챔피언십, 프레지던츠컵, 올림픽에 출전하고, 이번 제네시스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르는 등 역대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기술적으로는 비거리가 미PGA에서 정상을 다툴 정도로 늘었다. 그래서 지금 1부투어 우승은 시간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 영화 <역도산>을 보면 ‘세계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역도산보다 안병훈이 훨씬 더 세계인에 가깝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아버지 안재형과 어머니 자오즈민은 1989년 한중수교 전에 결혼을 올린 한중 우호관계의 상징이다. 당연히 혈통으로 보면 안병훈은 하프 코리언, 하프 차이니즈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다. 그리고 14살인 2005년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아왔다. 문화적으로 미국사람이기도 하다. 2018년 최희재 씨와 결혼할 때 안병훈은 유창한 3개국어(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하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병훈만큼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에 대해 잘 아는 스포츠스타는 없을지도 모른다.

#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세월을 이겨낼 수 없다. 언제가는 은퇴하고, 은퇴 후에도 즐겁고 의미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안병훈은 은퇴 후 골프 지도자 혹은 스포츠 행정가가 되기에 아주 좋은 자질을 갖췄다. 일단 한국과 중국, 미국을 모두 알고, 심지어 유럽생활까지 경험했다. 온갖 어려움도 극복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인성도 남다르다. 골프 성적에만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골프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아 투어생활을 즐긴다. 베풀 줄도 안다. 2019년부터 프로골퍼를 꿈꾸는 한국의 주니어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함께 생활하며 레슨하는 ‘안병훈 주니어 클리닉’을 지금까지 매년 실시했다. 모든 경비는 안병훈이 부담한다. 그리고 선발과정도 남다르다. “재능 있는 선수들보다 형편이 어려워 골프를 어렵게 하는 선수들을 돕고 싶어요. 포기하지 않도록 옆에서 힘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어떤가? 이쯤이면 안병훈이 IOC(국제올림픽위원회), PGA투어, 한국이나 중국의 스포츠계에서 훌륭한 리더로 활약하는 모습이 기대되지 않은가? 9년 만의 그의 우승에 아직 지나가지 않은 일을 언급하고 싶었다.

유병철 전문기자(가천대 운동재활융합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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