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한다” 말하는 이상한 법정···처벌 대신 ‘처방’을 내리는 판사[다만 마약에서 구하소서②]
②치료벨트의 시작, 미국 ‘약물법원’
“오늘 기분이 어때요? 법정에 나와 줘서 고마워요.” “재활 프로그램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미래를 응원합니다.”
법정 언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따뜻한 말로 피고인들을 챙긴 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카운티 고등법원에 설치된 ‘약물재활법원’(약물법원) 62부 재판장인 에리카 유 판사다. 피고인들에게 법정에 마련된 도넛을 챙겨 주기도 했다. 지난 10월4일(현지시간) 방문해서 본 풍경이다. 기침 소리 내기에도 조심스러운 한국 법정의 엄숙한 공기와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약물법원의 최우선 목표는 ‘약물 중독자들의 완전한 회복’이다. 법원은 혐의에 맞게 형량을 재단하는 대신 약물에 중독된 피고인들을 재활 프로그램에 연계하는 데 문제가 없을지 판단한다.
도넛 챙겨주며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판사
“석방입니다. 단, 재활 프로그램을 제대로 안 따르면 다시 구금될 거예요. 미래는 당신에게 달렸어요. 행운을 빕니다.” 유 판사는 이날 가능한 한 많은 피고인을 재활 프로그램으로 연계하려 했다. 범죄 혐의가 무거운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새출발의 기회를 얻었다. 재활을 시작하면 남은 수감 기간은 면제된다.
약물법원은 부작용이 극심했던 ‘마약과의 전쟁’ 결과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윤석열 정부도 외친 그 구호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언했다. 투약범이 대대적으로 잡혀 오면서 교도소가 수감자로 넘쳐났다. 1990년대엔 ‘오피오이드’ 계열 처방 진통제 남용까지 심각해졌다. ‘좀비 거리’의 주범 펜타닐이 이 계열이다. ‘중독자 수감→석방→재발→재수감’의 악순환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89년 플로리다주에 중독자 재활을 지원하는 약물법원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마약 투약을 처벌하는 대신 회복을 돕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서서히 전환됐다.
재판장은 피고인들을 범죄자가 아닌 회복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존중하려 했다. 행정적 이유로 재활시설 입소가 늦어진 피고인에게는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했고, 의료기관 검사를 받아야 하는 피고인에게는 “교도소에서는 선택권이 없이 살았을 테니, 원하는 검사 날짜와 시간을 선택해 달라”고 권했다. 이미 재활 중인 이들은 화상 대화를 통해 잘 회복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프로그램 이수를 마친 사람에게는 박수를 보내며 “이 성취감을 오래 기억하고, 다시는 법정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온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활시설 입소는 어디까지나 ‘조건부 석방’이다. 또 알코올·무기·마리화나 등을 소지 또는 사용해선 안 된다는 시설 이용 조건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 이걸 지킬 것이냐는 질문에 한 피고인이 “그래야죠”라고 대답하자 재판장은 “명확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피고인이 “해 보겠다”고 하자 “해 보지 말고, 반드시 하라”고 다그쳤다.
법원 설계도에도 반영된 재활 지원 의지···법정엔 장난감이
약물법원 법정엔 장난감 블록, 인형, 소꿉놀이 세트가 놓였다. 한쪽 구석엔 기저귀까지 비치됐다. 한국 법원과 비교하면 너무나 이질적인 풍경이다. 법정에 왜 이런 물품이 있는 것일까.
약물 중독을 겪는 피고인들이 ‘법원이 나를 돕는다’는 믿음을 갖게 하려고 마련해 둔 물건이다. 약물 투약으로 출석한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은 편안하게 꾸며진 환경에서, 법원 분위기에 위축되거나 트라우마를 겪지 않을 수 있다. ‘부모-자녀 분리’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당사자들이 덜 두려울 수 있다. 아이가 안전하게 지낼 것이라는 믿음은 부모에게도 회복의 원동력이 된다.
청사 설계부터 특별하다. 카운티 공공보건국 산하에는 약물 중독자들을 포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행동건강서비스(Behavioral Health Service·BHS)’ 부서가 있다. 신체·정신건강 관련 의학적 도움부터 주거·일자리 지원까지 종합적 회복을 돕는다. 청사는 BHS 직원 등 법원의 ‘사법 파트너’들이 모두 한 건물에서 일할 수 있게 설계했다. BHS 직원 30여명이 법원 청사에서 일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회복 성공률이 떨어진다는 경험에서 나온 조치다. 유 판사는 “약물 중독으로 사고력·판단력이 흐려진 사람들에게 ‘법원에서 두 블록 떨어진 사무실로 가서 프로그램에 등록하라’고 하면 이탈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시 법원도 사법 파트너 조직을 다른 건물로 옮겼다가 이런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약물 중독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엔 2층에서 재판을 받는다. 고층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폐소공포 증세가 나타날 수 있어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2층으로 보내는 것이다. 수유실, 어린이 놀이공간,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상담공간 같은 배려도 건물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넓게 열린 재활 인프라···“의지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약물법원을 거친 중독자들은 다양한 재활 프로그램으로 연계된다. 카운티가 직접 운영하거나 위탁을 한다. 이중 ‘뮤리엘 라이트’와 ‘에반스 레인’을 10월8일 둘러봤다.
뮤리엘 라이트는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이들이 이용한다. 나흘 전 법정에서 수의를 입고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한 남성도 이곳에서 다시 봤다.
한적한 공원 안에 자리잡은 이곳은 멋진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이용자들은 모두 창문이 있는 1인실을 쓴다. BHS 관계자 개비 올리바레즈는 “집 같은 환경으로 조성하려 했다.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는 것이 특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시설에 오면 먼저 디톡스 치료를 받는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문제가 없다고 판명되면 위기거주치료(CRT)와 약물사용치료서비스(SUTS) 프로그램으로 옮긴다. CRT는 정신과적 치료·상담을, SUTS는 트라우마 관리와 회복을 지원한다. 각각 최대 21일, 90일 이용할 수 있다.
CRT 책임자인 케빈 스크루지 박사는 “정신과적 증상 완화를 위해 진찰, 약 처방, 상담을 한다”며 “CRT 기간이 끝나도 필요에 따라 맞춤형 외래 진료를 연결해준다”고 했다.
무엇보다 트라우마 관리가 중요하다. 정신건강 전문 간호사인 케리 마틴 박사는 “약물 중독 문제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미국에선 대체로 어린 시절 심각한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란 대개 부모의 약물 중독이나 가정폭력, 성적 학대의 경험들이다. SUTS 책임자인 마이클 이바라 박사는 “대부분은 교정시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트라우마를 마주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며 “SUTS는 트라우마를 적절히 관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했다.
이바라 박사는 트라우마와 싸우는 이들을 위해 색다른 나들이를 계획하기도 한다. 그는 “내일은 낚시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망원경으로 별 보기, 바비큐 파티, 낚시 여행 같은 것은 이들이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고 했다.
에반스 레인은 뮤리엘 라이트에서 기초적인 회복 절차를 마치고 나면 연계되는 시설이다. 재활 지원과 함께 일자리 알선도 이뤄진다. 에반스 레인 관계자는 “여기에선 대부분의 입소자들이 학교를 다니거나 가게·창고·공사장 등에서 일을 한다”고 말했다. 컴퓨터 활용 자격증 같은 직업훈련도 인기가 있다. 뮤리엘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의사와 약사가 머무르며 입소자들의 건강을 챙긴다. 당뇨·혈압이나 정신과적 약물 처방을 관리한다.
소수자 전용 재활시설도 여러 곳이 있다. 아시아계 여성 중독자들을 위한 시설, 여성 중독자가 자녀와 함께 지내며 재활할 수 있는 시설들이 운영 중이다. 성소수자들은 BHS에서 운영하는 ‘큐코너’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중독자들이 재활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외에도 다양하다. 그중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피닉스하우스 캘리포니아’를 10월8일 방문했다. 미국의 대표적 재활시설로 꼽히는 피닉스하우스는 1967년 헤로인 중독자 6명의 재활공동체에서 시작됐고, 6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전국으로 확산됐다. 캘리포니아 지부 운영비는 카운티가 10%, 연방정부가 90%를 댄다.
피닉스하우스엔 ‘케어 코디네이터’가 있다. 입소자에 따라 디톡스만 필요한지, 정신과 진료나 외래도 필요한지 등을 살펴서 맞춤형 케어를 받을 수 있게 돕는다.
앨리스 글레그혼 대표는 “처음엔 약에 다시 손을 댄 입소자들을 내보내면서 엄격하게 운영했지만, 이 문턱이 너무 높아 엄두를 못 내는 이들이 많았다”며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번 미끄러져도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후 재활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회복에 성공한 사람들이 재활시설에서 일하는 ‘선순환’도 가능해졌다. 글레그혼 대표는 “어릴 적부터 20년을 중독으로 고생하다가 마침내 회복해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상담사 중 상당수가 회복자들”이라고 했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재활시설 ARC도 미국 전역에 있다. 10월7일 찾은 샌타클라라 카운티의 새너제이 ARC에서는 88명이 재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ARC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기부물품을 판매해 운영비를 충당한다. 입소자들은 옷·신발·가방 등을 분류하고 태그를 붙이는 작업에 열심이었다.
폴 시나드 소령은 “ARC에서는 건강보험을 6개월 무료로 제공한다”며 “회복 성공률은 80% 이상”이라고 전했다. 시설에서 만난 회복자 에스테반은 “13살에 시작한 약을 35세가 된 지금에서야 끊었다”며 “홈리스였고, 되는대로 살았지만 이곳에 와서 제대로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찾았다”며 웃었다.
경향신문 ‘다만 마약에서 구하소서’ 시리즈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새너제이 |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새너제이 |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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