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묘지에 묻힌 ‘K방산의 아버지’
31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비어 있던 자리에 ‘과학기술유공자 김재관의 묘’라고 적힌 묘비가 세워졌다. 1960~1970년대 포항제철소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고(故) 김재관(1933~2017년) 박사의 유해가 경기 화성에서 이날 이장됐다. 현충원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이나 경찰관, 소방관, 군인 등이 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김 박사는 과학기술과 한국 산업의 발전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된 후, 과학자로서 이날 현충원에 봉안된 것이다. 안장식에는 유족과 과학계 원로 3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그와 함께 연구를 했던 정낙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명예연구원은 “고인은 앞서 내다보는 혜안으로 국가와 사회 발전을 이끌었다”고 했다.
국가 수호에 대한 김 박사의 공헌은 전쟁터의 군인 못지않다. 그가 공장 자재 하나까지 챙기며 세운 포항제철소의 쇳물은 방산 국산화의 마중물이 됐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초대 총괄부소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엔 박격포, 로켓포, 대전차 지뢰 등 시제품을 제작했다.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표준연구원 초대 원장 등을 지내며 그가 기틀을 닦은 특수강, 중기계 공장, 대형 조선소는 대포·탱크·군함을 제작하는 방위산업의 전초 기지가 됐다.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긴급 명령을 내렸다. 소총과 박격포, 로켓포, 수류탄, 지뢰 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 이른바 ‘번개 사업’이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미군 철수를 추진한 ‘닉슨 독트린’으로 자주 국방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할 때였다.
1차에 이어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2차 번개 사업’의 실무 총괄을 당시 ADD 부소장으로 재직하던 김재관 박사가 맡았다.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철강과 기계 분야에서 김 박사는 당시 국내에서 최고 전문가였다. 주어진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그해 4월 시험 발사에서 박격포와 로켓포는 모두 목표물을 명중했다. ‘K방산’의 효시로 꼽히는 ‘번개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김 박사의 아내인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은 “남편은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연구에 매달렸다”며 “그때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K방산의 마중물을 붓다
방산 분야에서 김재관 박사의 기여는 단순히 미사일·전차 개발에 그치지 않는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했다. 현지 유학생들을 초청한 조찬 모임에서 박 대통령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김 박사가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보고서 표지에는 영어로 ‘한국에서 철강 공업 육성을 위한 제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3년 후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호 해외 유치 과학자로 김 박사를 불러들였다. 김 박사는 국가 숙원 사업인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 설계를 맡았고, 결국 연생산 103만t의 포항종합제철소를 세웠다.
포항제철소는 중공업뿐 아니라 국내 방산의 마중물이 됐다. 1978년 개발된 미사일 ‘백곰’, 1984년 개발 완료된 국산 전차 ‘K1′ 등이 모두 포항제철소의 쇳물로 만든 특수강으로 제작됐다. ‘K1′ 전차의 기술은 이후 ‘K2′와 K9 자주포 등을 발전했고, 백곰은 현무4 등 미사일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됐다. 이날 김 박사 봉안식에 참석한 한 제자는 “1970~1980년대 무기 개발은 미국 등 외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며 “김 박사가 개발한 무기의 기초 기술과 포철의 특수강이 없었으면 무기 국산화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KIST에서 초대 연구부장을 맡아 중공업 기반 산업화의 밑그림도 그렸다. 주물선(철 덩어리), 특수강, 중기계 공장, 대형 조선소 건설을 4대 핵심 분야로 키워야 한다고 했다. 모두 대포와 장갑차 등 군수 물자 제작에 필요한 군수 산업과 연결되는 분야로, 역시 오늘날 K방산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기술의 표준을 정립하다
김 박사와 방산의 인연은 필연과 같았다. 1933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김 박사는 1950년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첫 학기를 마치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미군 부대에서 통역원을 모집했고, 그는 전공을 살려 기계 관련 통역을 맡게 됐다. 영어로 적혀 있는 미국산 무기들의 사용 설명서를 한국군 장교들에게 알려주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군 박격포와 탱크 등 각종 중화기들이 특수강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수강까지 생산할 수 있는 종합 제철이 한국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을 굳힌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56년 서독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뮌헨공대로 향했다. 뮌헨공대에서는 기계공학, 철강학, 금속학, 자동차공학 등을 두루 공부했다. 1961년 5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듬해 독일 최대 철강사 ‘데마그’에 입사해 철강 생산 기술부터 제철소 기획과 건설, 특수강 생산 기술 등을 두루 익혔다. 1965년에는 가정도 꾸렸다. 독일에서도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이었지만 고국에서 철강 공업을 육성할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의 기반이 되는 ‘표준’ 역시 김 박사의 관심사였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설립을 지휘하고 초대 및 2대 소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에는 ‘한국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시간 표준을 확립하지 못해 일본 방송국의 시보를 받아 사용했다. 그는 국제원자시와 협정세계시를 나타내는 시계를 확보해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시간 표준을 구현했다. 이호성 표준연구원 원장은 “방산을 비롯해 모든 첨단 산업의 근간이 되는 ‘표준’이라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인천대 기계공학부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2017년 12월 89세로 별세했다. 숱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박사가 인천대 교수로 재직할 때 제자였던 이태식씨는 “본인이 하신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다”며 “묵묵하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일하셨는데, 이제라도 국립묘지에 안장돼 뜻깊게 생각한다”고 했다.
유족들은 김 박사의 이번 국립묘지 안장이 과학기술인에 대한 존중과 예우가 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과학기술유공자 중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6명에 불과하다. 김 박사가 7번째다.
이날 안장식에 앞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연못 정자에는 김 박사의 호를 따 ‘우정’이라는 현판이 붙었다. 우정(宇正)은 ‘온 우주의 균형이 올바로 잡히다’라는 뜻이다. 김 박사의 아들인 김원준 삼성글로벌리서치 대표도 부친의 뜻을 이어 공학과 산업 관련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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