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늦게 찾아 온 가을…시 한 편의 위안
어쩔 수 없는 불안에 대한 인정
꾸미지 않는 ‘몰락’의 진실 표현
이홍섭 ‘제비’ 연작 병상의 기록
생로병사 이야기 속 간절함 담아
오현스님 추도시 작품도 잇따라
11월의 첫날이 오고야 말았다. 유독 무더웠던 올해는 가을 소식이 늦었다. 이제야 겨우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는데 시 읽는 계절 ‘10월’이 다 가버렸다. 세상은 무심하게 돌아가고, 사람들도 그 속도에 휩쓸려 허덕인다. 가리워진 길 위에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시 한 줄일지 모른다. 횡성 출신 박찬일 시인과 강릉 출신 이홍섭 시인이 7년 만에 새 시집을 펴냈다. 그들의 시편은 죽음에 대한 걱정을 순화시키고, 헛헛한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든다. 가을은 온갖 생명의 부고가 시작되는 때, 10월의 마지막 날 시집의 서평을 쓴다.
■ 박찬일 ‘기쁨의 총회’
어떤 이들은 쓸모없는 말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을 ‘시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믿는다. 쓸모없음을 실천하는 인간을. 쓸모없는 말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고향인 횡성 월현리로 거처를 옮긴 박찬일 시인이 10번째 시집 ‘기쁨의 총회’를 펴냈다. ‘죽은 병사를 위한 노래’ 외 95편의 시가 수록됐다. 그의 시집은 언어적 부조리로 보이지만, 정당하다.
“적의 편에서 적을 위해 싸운다. 이루고 싶지 않은 게 이루어지는 거다.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루어지는 거다”라는 시인의 말부터 짐작할 수 있다. 니체가 연상되는 철학서로도 보이니 독자를 괴롭히는 시인일 수도 있겠다.
시인의 머릿속은 소란스럽다. 불안하다. 어쩔 수 없다. ‘님의 침묵 풍으로’ 썼다는 시에 의하면 “나는 나에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인생이 쪽팔린다”라고 고백하는 순수성, 몰락을 꾸미지 않는 것은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근심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내내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우리 삶 아닌가. 시인은 “죽을 준비하지 마라 태어날 준비 없이 죽을 준비 없이 태어나고 죽는 게 맞다”고 강력한 위로를 던진다.
기쁨 후에는 바로 비애가 덮친다. 그렇기에 시인은 ‘기쁨의 총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기쁨이 인생인 인생’은 올 수 있을까. 시집은 별도의 해설도 싣지 않았다.
시 ‘무명(無明)’의 마지막 글귀가 두고두고 곱씹을만 하다. “가벼운 것이 역사를 끌고 간다. 가벼운데 무거운 것이 역사를 질질 끌고 갔다.”
■ 이홍섭 ‘네루다의 종소리’
제비는 봄소식을 전하는 대표적인 여름 철새다. 제비가 물어다 주는 박씨는 우리가 그토록 기다린 봄일 것이다. 내일에 대한 기약 없이 겨울을 맞는 이들에게 제비의 봄소식은 더욱 간절하다.
이홍섭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에서는 생로병사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읽힌다. 시집 초반부 ‘제비’ 연작은 아픔에 대한 기록이다. 사흘 내내 한 됫박 피를 쏟고 병원을 돌다 와 보니 제비가 우편함 위에 하얀 똥을 가득 싸놓았다고 한다. 아마 돌아오지 않았으면 개봉하지 않은 인연과 연체료는 영영 묻혔을 것이다. 최종 진단까지 열흘하고 이틀, 시를 써서 얻은 것이 있다면 “죽음을 순하게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다수의 시편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간절함도 드러낸다. 마음이 허한 가을이 오면 늘 삼겹살집 앞을 서성였다고 한다. ‘정선’에서는 “할 얘기가 많은데” 못다 한 말들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 살고 싶은 자는 ‘춘천’으로 향하고, “봄내는 그렇게 내 봄”이 되는 것이란다.
시집 후반부에는 설악산 오현스님에 대한 추도시가 실려있다. 시인은 스님으로부터 ‘무인’(無人)이라는 법명을 받은 유발상좌다. “반나절은 삶에 취하고 반나절은 죽음에 취하시더니/삶도 죽음도 애기처럼 안고 잠드셨네”라고 긴 잠에 든 스님을 추모한다. 산문에서는 “시인은 배가 고파서, 늘 허기가 져서 종소리로 배를 채워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라고 했다.
시인의 병명은 여전히 원인불상이다. 종소리가 울리는 곳에 몸을 두고자 할 뿐이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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