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11. 금강의 단풍

김진형 2024. 11. 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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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산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일 금강산을 못 보았다면 족히 명산을 구경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단풍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일 금강산의 단풍을 못 봤다면 이는 단풍 구경을 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금강산은 또 다른 이름이 단풍산이니만큼 예로부터 단풍이 유명한 곳이다.

아무리 천하 명수의 분재가라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어서 만들지 못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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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의 참모습을 묻거든, 금강산의 풍광을 보게하라
(1930년 10월 ‘별건곤’ 5권 6호)
“단풍이 있기에 금강산의 명성이 있고
단풍은 금강산에서 나와 명물이 된다”
예로부터 단풍으로 유명한 조선 명산
음력 팔월상순경 단풍잎 물들기 시작
붉은 단장한 만이천봉 비단장막 같아
강원도 고성·김화·회양·통천군 걸친 산
강원 태생 차상찬에게 자부심이었을 것

조선의 명산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일 금강산을 못 보았다면 족히 명산을 구경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단풍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일 금강산의 단풍을 못 봤다면 이는 단풍 구경을 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금강산은 또 다른 이름이 단풍산이니만큼 예로부터 단풍이 유명한 곳이다. 온 산에 단풍나무가 많은 것도 많은 것이거니와, 원래에 산이 이를 데 없이 기괴하고 암석과 계곡이 신비스럽고 괴이하며 기묘한 산이다. 그런 까닭에 그곳의 나무까지도 자연 진기하고 몹시 기기묘묘하다. 아무리 천하 명수의 분재가라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어서 만들지 못할 것이 많다. 봄의 꽃이나 여름의 녹음, 그 어느 것도 좋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히 음력으로 팔월 상순경이 되면 동북 해상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벌써 비로봉 꼭대기에 서리꽃을 피게 하고 유점사 오십삼불의 감중련1 한 손가락에 아침저녁 찬 기운이 돌며 한 나무 두 나무의 단풍잎이 붉게 물듦을 알리는 깃발을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불과 며칠 사이에 ‘하룻밤 가을바람에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붉어지며 만이천봉이 일시에 붉은 단장을 하게 된다. 쳐다보면 천 폭 만 폭의 홍색 비단 장막이 봉우리마다 드리운 것 같고, 내려다보면 십 리, 오 리의 여러 빛깔로 아롱진 노을이 골짜기마다 두른 듯하다.

그중에도 동해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온 산에 가득한 단풍과 마주 비치고 그것이 다시 구룡폭포나 만폭 같은 장엄한 폭포에 반사되면, 그야말로 만 길이나 되는 색색의 무지개가 너른 하늘에 걸린 듯 오색의 신룡이 짙푸른 바다에 비약하는 듯하다. 이는 실로 장쾌하기 이를 데 없고 기묘하기 이를 데가 없으니 실로 천하에 기이하고 멋진 풍광을 이룬다. 옛사람의 시에 이른바 ‘서리 맞은 단풍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구나’라던지 ‘산 얼굴 단풍으로 장식하니 수놓은 비단처럼 수려한 고을이네’ 같은 시구로는 감히 형언도 못할 것이다. 옛날 중국 사람의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구나”라는 말은 누구나 다시 고쳐서 “금강산에 올라 단풍 경치를 한번 보고 싶구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가객이 보면 자연히 노래가 나오고 시인이 보면 저절로 시흥이 솟아나고, 무용가가 보면 엉덩이가 들먹거리고 화가가 보면 붓끝이 옴질옴질할 것이다. 아무리 연애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여 홧김에 만폭동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던 낙망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고는 쾌재! 기재!를 부르고 그것이 못 잊혀 죽지 못할 것이다. 금강을 세계 명산이라 하지만 만일 금강산에 단풍이 없다면 세계 명산의 가치를 잃을 것이다. 이 단풍이 있기에 더욱 그 명성을 세계에 떨치고, 단풍은 또 이 금강에서 나왔기에, 또한 세계 명물이 되는 것이다.이 금강을 구경하는 여정은 신문으로 잡지로 여러 사람의 저서로, 또 근래에 있어서는 영업 정책의 눈이 단풍보다도 더 붉어진 철도국에서 해마다 상세한 소개를 하여 이미 독자가 잘 짐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경로와 명승지의 대략만 소개하고 붓을 놓으려 한다.

금강산은 그 구역이 약 백여 방리, 주위가 이백여 리(우리의 옛 리)로 강원도의 고성·김화·회양·통천 네 개 군을 점거하였다. 중앙 연봉의 서측을 내금강 그 동편을 외금강이라 하고, 또 산맥 원줄기 뼈대의 동해(고성방면)에 임한 곳을 해금강이라 한다. 내금강에는 괘궁정, 탑거리, 장안사, 명경대, 영원암, 수렴동, 백탑동, 망군대, 명연담, 배재령, 삼불암과 백화암·표훈사·정양사, 만폭동과 팔담, 보덕굴·마하연·백운대, 가섭동과 수미암, 비로봉(금강산의 최고봉인데 높이가 1786미터), 묘길상 등의 명승이 있다.(이 명승은 관람 순서로 적은 것인데 아래도 같음)

또 외금강은 온천장으로 유명한 온정리를 위시하여 한하계, 신·구만물상, 신계사, 옥류계, 구룡연, 상팔담, 고성의 여러 승경과 해금강, 만경대와 미륵봉, 유점사, 송림사, 신금강 등의 뛰어난 절경이 있다(해금강도 포함).

그리고 통로로 말하면 내금강으로 가는 데는 경성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철원까지 가서 다시 금강산 전철로 환승하면 금강산 입구에까지 갈 수 있다. 이어 자동차로 장안사에 곧바로 도달할 수가 있는데, 내년 봄, 산길이 열릴 시기에는 장안사까지 전차가 직통하게 된다. 외금강의 통로는 해륙 양로가 있으니, 육로는 경성에서 원산까지 기차로 가고 원산에서는 다시 자동차로 고저 통천을 경유하여 온정리까지 간다. 가는 도중 고저 해안에는 유명한 총석정의 보기 드문 기이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내년 봄에 안변에서 장전까지 기차가 개통한다. 또 바닷길로는 원산에서 장전까지 가서 장전에서 다시 온정리행 자동차를 환승한다.


■ 각주
주역에서 팔괘의 하나인 ‘감’괘의 상형 을 이르는 말.

■ 해설

‘금강산’은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언급된 산이었다. 수려한 경치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의 절이라는 지위를 가진 대찰이었던 ‘유점사’를 비롯한 수많은 절이 있던 탓도 있다. 조선뿐 아니라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금강산을 사랑하고 경외한 것은 오랜 일이었다. 신라 시대엔 화랑들의 유람 장소였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여생을 보낸 곳도 금강산이었다.

제주도의 거상이었던 ‘김만덕’이 소원을 묻는 정조에게 ‘금강산 구경’을 청했다는 일화에서도 당시 금강산이 많은 이들의 동경의 장소였음을 읽을 수 있다.

금강산은 점차 불교가 흥하면서 가장 많은 절이 창건된 곳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법기보살’이 거하는 곳으로 알려져 동아시아의 불교 성지로 알려졌다. 애초에 ‘금강’이라는 말의 연원을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적힌 데서 찾기도 하는 이유다. 여러 연유로 금강산은 이웃 나라에서도 가보고 싶은 장소로 꼽혀왔다.

차상찬의 글에도 나오는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한 옛사람은 북송의 시인인 소동파로 알려져 있다. 이는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실제 1404년 조선왕조실록에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가고 싶어 한다는 기록과 함께 소동파의 글과 대동소이한 문구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철도사업가 ‘구메 다미노스케’가 전기철도인 금강산선을 부설한 것도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는 동아시아인들의 갈망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금강산선이 운행되자 시속 30㎞의 느린 속도에도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일본의 유명 가인 ‘와카야마 보쿠스이’가 죽기 1년 전 금강산을 여행 후 그 감상을 여러 곳에 남긴 건 유명한 일화이다.

영국의 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세계의 여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다”라고 찬양했고,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왕세자 시절인 1926년 금강산을 방문하고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금강산을 만드는 데 하루를 썼을 것이다”라고 감탄했다는 말은 여전히 전설처럼 회자하고 있다.

이처럼 금강산을 찬송한 에피소드는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

당시 언론인이었던 차상찬은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었고, 강원 태생인 그에게 금강산은 고향 땅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개벽사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위해 홀로 89일간 강원도 곳곳을 누볐던 그는 지면이 부족해 ‘강원도 도호에 금강산과 각 사찰의 기사를 쓰지 않은 것은 사람을 그리는데 눈썹과 눈을 뺀 것과 같다’고 아쉬워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금강산 하나를 다루더라도 엄청난 지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러한 아쉬움을 이후 글로 대신하는데, 그중 하나가 ‘금강의 단풍’이라는 이 글이다. 특히 가을을 맞아, 금강의 단풍의 아름다움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단풍이 있어서 금강산의 명성이 있고, 단풍은 금강산에서 나와서 명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다.

이후엔 1939년 ‘소년’ 10월호에 ‘팔도 산수타령’이라는 연재물 중 ‘금강산’이란 제목의 글을 싣기도 한다. 그는 금강산 사진과 함께 어린이들에게 금강산의 별명, 사찰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며 금강산이 ‘전세계에서 제일가는 명산’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늘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던 그의 글쓰기의 연장선에서 주목해볼 만한 대목이다.

가을이 왔다. 곳곳에서 단풍이 들고, 찰나의 아름다움은 길었던 여름을 금세 잊게 만든다. 북한과의 교류로 잠시 금강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이들이 꿈같았던 금강의 단풍을 이야기하고는 한다. 아쉽기 그지 없는 부분이다. 금강산은 강원도의 보물이자 자랑이다. 바라건대, 하루 빨리 차상찬이 말했던 진정한 금강산의 가을을 느낄 날이 오기를, 강원도민의 하나로서 그저 바라고 또 바랄뿐이다.


△현대어 번역=강원문화교육연구소
△발췌문헌=수춘산인 ‘금강의 단풍’, 1930년 10월 ‘별건곤’ 5권 6호(‘차상찬전집 6’, 145∼148쪽)
△해설=이현준 한림대 강사·강원문화교육연구소 차상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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