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몸뚱이뿐인 노동자에게 보내는 응원”[제32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박송이 기자 2024. 10. 3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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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최희명 ‘꽃비 내리는 날’
32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양성민(르포 부문·왼쪽), 최희명(소설 부문)씨가 지난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숙자씨는 큰아이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페인트공들의 뒷일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묻은 페인트 얼룩을 쇠주걱 하나로 온종일 밀어대는 일이다. 숙자씨는 사람에 치이는 일 없이 내내 바닥을 마주하며 면벽참선하듯 하는 이 일이 다른 일보다 좋았다. 식당에서 일할 때처럼 손님들의 갑질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손목과 어깨, 종일 쪼그리고 앉았던 다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 축축 처지는 고단함에 지친 숙자씨는 불현듯 ‘죽지 않을 만큼 교통사고나 나버려라’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정말로 숙자씨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숙자씨는 땅으로 고꾸라지는 사고를 당한다.

수상작인 최희명씨의 단편소설 ‘꽃비 내리는 날’은 노년 여성의 노동을 다룬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오늘날 노년의 여성 노동이 겪는 사회적 현실을 극도로 현실적이고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이를 단순히 연민이나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당사자의 감각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존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려냈다”며 “이를 통해 소설은 노년의 노동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속에서도 밝은 감정을 지켜내는 주인공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서사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꽃비 내리는 날’은 최씨가 페인트 공사장에서 직접 겪은 일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다.

최씨는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식당 일을 해왔다. 지금도 노령연금과 국민연금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할 때면 식당에서 서빙을 한다”며 “페인트 뒷일은 제안이 들어왔기에 소설 글감을 염두에 두고 시작해봤는데 이틀 만에 소설에서처럼 부상을 당했다”고 말했다.

최씨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삶의 가파른 등선을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남편과 헤어지고 하루 12시간씩 식당 일을 하며 홀로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너무 힘들었지만, 이렇게 일하며 살다 애들이 다 커버리고 나면 내가 너무 허무해질 것 같았어요.”

한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강좌를 들으며 수필을 쓰기 시작했고 2006년 월간 ‘예술세계’, 201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2013년에는 수필집 <간맞추기>도 출간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네 인생 자체가 소설”이라며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한 한 친구 때문이었다. 틈날 때마다 쓰다보니 공모전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시름을 글로 풀어버리면 해소가 되더라고요. 또 아파서 일을 못할 때면 생활비 벌려고 공모전에 글을 내기도 했어요.”

소설 속 숙자씨는 사고 다음날 온몸의 통증을 느끼며 겨우 병원을 찾는다. 병원의 권유로 입원을 했지만, 숙자씨는 입원을 해도 될 일인지 난감해한다. 버스 기사의 잘못이지만 아무래도 ‘죽지 않을 만큼 교통사고나 나버려라’고 했던 자신의 생각이 발단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병원에 입원해서야 숙자씨는 오랜만에 깊은 휴식을 누린다. “누구에게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숙자씨” 앞에 끼니 때마다 따뜻한 밥상이 차려지고 밀린 잠도 실컷 자고 나니 어느덧 통증들도 잠잠해졌다. 그러다 불현듯 아직 부족한 큰애의 등록금이 떠올라 밤에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 페인트 뒷일을 하기도 한다. 숙자씨는 보험사 직원의 방문을 앞두고 병원에서 자신이 하는 행동을 끊임없이 검열하며 혹시나 ‘나이롱환자’로 색출될까 조마조마하다.

최씨는 자신의 생각까지 탓하는 숙자씨 캐릭터를 두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안 좋은 일을 당해도 한 번도 사죄받아보지 못하고 배상이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손해나 부당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심리를 극대화시켜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씨에게 글쓰기는 ‘빈칸 채우기’이다. 가난으로 못 먹고 못 배웠던 어린 시절 비어 있던 시간들을 채워간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양산구 기장면의 신앙촌 와이셔츠 공장에서 실밥을 따던 열다섯 살 소녀가 구로공단의 편물 공장과 S전자의 스피커 공장을 거쳐 어른이 된 후에도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해왔나 생각해본다”며 “오로지 두 다리만으로 먼먼 노동의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주는 응원이라 믿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밝혔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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