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흥망성쇠 지켜본 540살 군산 팽나무…천연기념물 됐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하제마을은 이제 사라지지 않습니다. 팽나무가 우리를 묶어주고 지켜주는 구심점이 될 것 같아요. 영원한 수호수로 남아있을 겁니다.”
31일 오후, 고요했던 전북 군산 하제마을이 들썩였다.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팽나무 앞에 모였다. 하제마을 팽나무가 국가 자연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다.
국가유산청은 이날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국가유산청은 지정 이유로 “과거 배를 묶어두던 기둥인 계선주(繫船柱) 역할을 하며 조선 초기부터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하제마을 팽나무는 마을에 항구가 생기고 기차가 들어서며 번성하던 모습부터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며 사라져 간 지금의 모습까지 모두 지켜보며 하제마을을 굳건히 지켜왔다는 점에서 뛰어난 역사적 가치를 지녔다”고 했다.
하제마을 팽나무의 나이는 537(±50)살로 추정된다. 과학적(생장추 측정)으로 측정한 팽나무 중 가장 오래됐다. 높이는 20m, 가슴높이 둘레도 7.5m로 규모도 크다. 국가유산청이 밝힌 것처럼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또 한때 번성했던 마을이 쇠락해가는 모습을 모두 묵묵히 바라보며 자리를 지킨 게 팽나무다.
하제마을은 상실의 역사와도 맞물려있다. 다른 팽나무와 달리 이 나무에는 깊은 주름이 올올이 새겨있는데, 과거 배를 묶어두던 기둥 역할을 하며 새겨진 상처다. 조선 시대에는 섬이었다. 섬 북쪽부터 상제, 중제, 하제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간척돼 육지와 이어졌고, 일본이 비행장을 만들며 상제가 사라졌다. 해방 이후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중제가 사라지더니 다시 미군기지가 확장되고 새만금 방조제가 막히면서 하제도 사라졌다. 생업을 잃은 주민들은 2009년부터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664가구가 터전을 떠났다. 20세기 초, 간척사업으로 섬에서 뭍으로 변했지만 사람은 살지 않는다.
‘하제마을 팽나무’도 자칫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뻔했지만, 하제마을을 기억하려는, 팽나무를 사랑하고, 인근 수라 갯벌을 되살리려는 시민들의 힘이 모여 꿋꿋하게 버텨왔다.
지난 2020년 10월부터 매달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토요일마다 군산 하제마을의 팽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모인다. 수십명에서 많게는 100여명의 지역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이곳을 찾아 팽나무를 지키기 위한 ‘팽팽문화제’를 열고 있다. 만으로 4년, 비와 눈이 많이 내려 개최하지 못한 2번을 빼면 지금까지 46번의 문화제가 열렸다.
문화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는 여정진(73)씨는 하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여씨는 이날 지정식에도 참석해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이렇게 주목받는 현실이 애석하다”면서도 “그나마 고향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 건 한결같은 이 팽나무뿐”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팽나무와 하제마을의 동·식물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활동도 진행됐다. 네이버의 기부 플랫폼을 통해 사단법인 자연의벗이 진행한 모금은 2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면서 모금액 900만원을 달성했다. 최근 환경 조사에서 기린초나 큰꿩의비름, 바위채송화 등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식물과 멸종위기 포유류 및 곤충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영화 ‘수라’를 연출한 황윤 감독이 영상으로 기록해 하제의 현실과 팽나무, 하제 생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리는 캠페인을 추진할 예정이다.
걱정거리는 남아있다. 팽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는 인근 미군기지의 ‘군사지역’이라는 팻말이 적힌 울타리를 지나와야 하는데, 미군기지에서 문을 막으면 길이 막히는 구조다. 이날도 행사 내내 전투기 날아다니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하제마을 출신으로 충남 아산에 사는 홍성만(71)씨는 “미군기지가 확장되면서 팽나무 오는 길이 막혀버릴까 그게 가장 걱정”이라며 “천연기념물이 됐으니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천경석 기자 1000pr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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