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 최소화하고 만족감 최대화하는 게 개혁의 관건”[창간 33주년 특집]
‘윤 정부 개혁 이렇게’ 전문가 인터뷰 - <1> 김기협 역사학자
“현실적인 성과를 바라볼 만한 선에서 추진하는 개혁이 잘하는 개혁입니다. 개혁의 추진 과정이 곧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제도의 원만한 운영이 가장 기본적인 개혁의 조건이라고 봅니다.” 역사학자 김기협(74) 씨는 지난 29일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개혁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이분법적 평가보다 성과의 많고 적음을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윤석열 정부의 연금·의료·교육·노동 등 4대 개혁에 저출생 위기 극복을 더한 ‘4+1 개혁’이 차질을 빚는 이유에 대해서는 “개혁을 공짜로 선심 쓰는 일처럼 생각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씨는 ‘무한한 개혁 정신을 갖춘 지도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혁으로) 손해 보는 쪽의 피해 의식을 최소화하고, 이득 보는 쪽의 만족감을 최대화하는 데 관건이 있다”고 전망했다. 또 개혁에 대한 저항을 줄이기 위해 보수파가 추진하는 개혁 원칙은 ‘한 발짝 늦게’ 바꾸는 타이밍에 있다고 조언했다. 서울대 문리대를 수석 입학해 물리학과에 진학했지만 돌연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역사학자인 김 씨는 40대에 안정된 교수직을 떠난 뒤 홀로 문명사를 탐구하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다. 김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7일부터 10여 차례에 걸친 이메일 교환과 대면 인터뷰로 진행됐다.
■ 개혁의 성공 조건
손해 보는 쪽 피해의식 최소화하고
이득 보는 쪽 만족감 최대화해야
현실적 성과 내는 게 ‘잘하는 개혁’
―역사에서 ‘개혁’은 어떤 의미입니까.
“큰 범위의 제도적 변화 중 주체 또는 지도부가 연속성을 지킨다는 점에서 ‘혁명’과 대비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뜻으로 대개 쓰입니다. 혁명은 그 진행 과정에서 주체가 바뀌기 때문에 혼란과 고통이 클 수밖에 없고 성과에 대해서도 예측이 힘들기 때문에 혁명을 피하는 것이 정치의 사명이고 그 유력한 수단이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의 용도·기간은 한정적이지만 ‘개혁 정신’은 무한한 것 같습니다. 개혁 정신이란 무엇일까요.
“가시화된 개혁은 바라보는 변화의 범위가 한정돼 있습니다. 개혁에는 많은 사람의 참여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는 한정된 범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지요. 혁명론에 ‘영구혁명’이 있는데, 항속성은 개혁 쪽의 필요가 더 큽니다. 어떤 개혁이든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더 차원 높은 개혁을 가시권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입니다. 소극적 참여자는 당장 가시화된 개혁 내용에만 몰두하지만, 개혁의 지도자는 무한한 개혁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4+1 개혁’을 공언했는데 뚜렷한 성과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혁을 공짜로 선심 쓰는 일처럼 생각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개혁에 드는 비용(기회비용 포함)을 잘 계산해서 충분히 투입하도록 계획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 개혁 추진 과정
반대파 열성이 늘 지지파 앞서
두 발짝 늦어지면 피해 커지니
‘한 발짝 늦게’ 점진적 추진을
―옳은 개혁과 그른 개혁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개혁의 옳고 그름(도덕적 평가)보다는 잘 되고 못 된 기술적 평가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손해 보는 쪽의 피해 의식을 최소화하고 이득 보는 쪽의 만족감을 최대화하는 데 관건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개혁으로 인해 특정 집단의 피해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피해 의식’ 대신 ‘양보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밀한 계산과 착실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개혁에는 언제나 저항이 뒤따랐습니다. 개혁에 대한 저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이번 의료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지요. 의사 중에는 의사 증원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수구적 그룹과 바람직한 변화로 환영하는 개혁적 그룹 사이에 ‘부득이한 범위의 변화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중간파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저놈들 다 도둑놈들이야!’ 몰아붙이니 개혁적 그룹조차 반발하거나 외면해서 수구적 그룹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개혁의 목표 자체를 너무 급진적으로 잡지 말고 지지하는 범위를 넉넉히 확보하며 점진적 또는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개혁 지지파는 상대적으로 ‘소극적’ 지지에 그치지만, 반대파는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이런 에너지의 불균형은 개혁 추진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됩니까.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지지파의 열성이 반대파를 따라가기 힘든 것이 모든 개혁의 어려움입니다. ‘한 발짝 늦게’ 바꾸는 것을 보수의 원칙으로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할 때라야 개혁이 가능한데, 너무 늦으면 피해가 커지니까 두 발짝 이상 늦지 않게 해야지요. 타이밍을 잘 맞춰 그럴싸한 이벤트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의료개혁과 저항 극복
안정된 민심 없으면 포퓰리즘
의료인 입장도 주요 민심요소
개혁을 선심 쓰듯 해선 안돼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정부가 자기 쪽 잘못을 바로잡는 진지한 태도를 보인 후에 의사 집단에 대한 비판도, 더 책임 있는 태도에 대한 요구도 시작될 수 있겠지요. 지금은 피해자 위치라서 비판할 상황이 아닙니다. 정부의 의사 집단 악마화는 야비한 이간질일 뿐입니다.”
―여러 개혁을 한꺼번에 추진하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 수 있습니까. 이런 동시다발적인 개혁의 장점도 있습니까.
“개혁의 동력을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여러 방면의 개혁을 병행시켜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것이 일반적으로 유력한 전략입니다. 단, 그를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과 집중된 노력이 필요하죠.”
―개혁에 대한 성공 조건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개혁이란 것이 절대적 목표를 두기보다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혁의 성공 여부보다(이분법적 평가) 성과의 많고 적음을(계량적 평가) 살피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적인 성과를 바라볼 만한 선에서 추진하는 개혁이 잘하는 개혁이지요. 개혁의 추진 과정이 곧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제도의 원만한 운영이 가장 기본적인 개혁의 조건이라고 봅니다.”
―역사에서 성공한 개혁이 있다면 어떤 것을 꼽으시겠습니까.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두 개혁이 웬만큼 잘된 것이라고 보니까 꼽을 것이 너무 많지요. 그러나 조봉암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토지개혁은 몹시 불리한 여건(권력자의 비협조 등) 속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특별히 평가합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혁명 중독증을 벗어나 꾸준히 진행돼왔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할 수 있고요. 개혁의 성과가 가장 큰 군주로 세종을 꼽을 수 있는데, 건국 과정이 진행되는 때였고 태종이 기득권 세력을 때려잡은 조건 위에서였기 때문에 ‘개혁’보다 ‘혁명’의 성격을 가진 성과였죠. 진짜 ‘개혁’의 노력이 두드러진 것은 정조였고, 그 노력의 자세가 얼마 전 공개된 어찰집에 나타나 있지요.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야당 당수인 셈인데, 그 협력을 설득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간곡한 편지를 거듭거듭 쓴 데서 개혁군주의 모범적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소수 엘리트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행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한 사례가 있을까요.
“‘위로부터의 개혁’이 모든 개혁의 표준적 양상입니다. 비(非)엘리트가 주체가 되는 변화는 개혁보다 혁명의 성격을 띠게 되기 쉽지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 해서 민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심에는 현실 인식에 불안정한 문제가 있어서 (자극적인 요인에 지나치게 좌우되는 등) 개혁 추진 그룹이 안정된 민심의 형성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노력 없이 ‘대중의 지지’만 찾아다닌다면 포퓰리즘 중에도 저급한 포퓰리즘에 머무르게 되겠죠. 의료 개혁 문제에서 포퓰리즘 문제가 단적으로 나타났죠. 의대 정원 증원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 지지를 발판으로 안정된 민심을 빚어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 민심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의료인의 입장이지요. 의료인의 참여 없는 의료 개혁이라니, 놀라운 발상입니다.”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하지만 대통령 임기는 5년에 불과합니다.
“임기 5년이 너무 짧아서 개혁 추진이 어렵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아니라도 정치인이라면 ‘개혁’을 소명으로 여기고 자나 깨나 그 준비와 실행에 매진해야지요. 그 노릇을 잘하는 정치인이 더 많았으면 좋겠지만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는 그 측면이 유별나게 경시되는 장면을 많이 봐 왔습니다. 물론 4년 중임제 같으면 5년 단임제보다 좋은 여건이 되겠지요.”
―현재 대한민국에 필요한 개혁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다른 모든 개혁을 추진할 출발점으로 정치 개혁의 필요가 가장 절실합니다. 제도 자체에도 아쉬운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인’의 직업의식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건전한 의식을 가진 정치인들이 늘어나 왔으니, 지금 펼쳐지고 있는 파탄이 대오각성의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195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사학과 학사 △경북대 대학원 석사 △연세대 대학원 박사 △계명대 사학과 교수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저서 ‘해방일기 1~10권’ ‘뉴라이트 비판’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밖에서 본 한국사’
김윤희 기자 wor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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