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플라스틱·환경호르몬 걱정없는 텀블러… 나를 위한 선택” [Life with Tumbler] [창간 33주년 특집]
Life with Tumbler - (1) 작은 실천 큰 기쁨
“유독성 물질 노출 걱정없어… 건강 위해 쓰기시작”
물·커피부터 떡볶이·호떡 등 길거리 음식 포장도
해변에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보고 큰 충격
“환경 보호에 기여한다 생각하니 자존감도 높아져”
텀블러(Tumbler)는 손잡이가 없고 길쭉한 형태의 컵을 말하지만, 2010년대 후반 ‘환경 선진국’들이 일회용품으로 인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회용 컵 사용을 독려하면서 일회용 컵의 반대말처럼 쓰이고 있다. 최근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따라 제품을 구매하는 ‘가치 소비’ 문화에 힘입어 텀블러를 구매하고 사용하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 문화일보는 창간 33주년을 맞아 ‘지구와 나를 지키는 첫걸음, 텀블러’를 주제로 텀블러 애호가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지구를 살리자’는 거창한 목표 때문만은 아니에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면 미세플라스틱에 노출된다는 사실에 놀라 제 건강을 위해 텀블러를 쓰기 시작했어요.”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받은 뒤로 텀블러를 쓰기 시작했어요. 비록 작은 행동 하나에 불과하지만 일상을 더욱 가치 있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합니다.”
지구를 살리고, 나를 아끼는 첫걸음으로서 텀블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시민들의 말이다. 31일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4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7.8%가 ‘친환경 제품을 구입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친환경 제품 사용은 지구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행위’로 간주되기 쉽지만, 텀블러를 사용하는 시민들은 오히려 ‘이기적 행동’으로 출발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기심’으로 출발한 텀블러 사용 =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제로웨이스트(zero waste·쓰레기 최소화) 상점’에서 만난 이정훈 씨는 “평소처럼 카페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받아 음료를 마시는데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강하게 밀려왔다”며 “이후 일회용 컵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나올 수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3년 전부터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씨는 “매일같이 텀블러를 깨끗하게 씻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음료를 마실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학계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일회용품에서 검출되는 미세플라스틱·나노플라스틱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다. 2018년 미국 뉴욕주립대 연구팀은 9개 국가의 생수 제품 중 93%에서 1ℓ당 평균 10.4개의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난해 노르웨이 과학기술대, 중국 난카이대 등이 참여한 국제연구팀 연구에 따르면 노르웨이 생수 브랜드 4개의 페트병에 담긴 생수 1ml당 평균 1억6600만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들어 있었다.
지난 1월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에서는 미국 월마트 판매 생수 제품 중 1ℓ당 평균 24만 개의 플라스틱 입자가 검출됐는데, 이 중 10%는 지름 1㎚(나노미터)∼5㎜ 크기의 미세플라스틱이었고, 나머지는 지름 1㎛(마이크로미터·1000분의 1㎜)보다 작은 나노플라스틱이었다.
202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연구팀 발표에 따르면 건강한 성인 22명 중 17명의 혈액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됐는데, 이 중 가장 많이 검출된 성분이 바로 생수·음료병에 주로 쓰이는 페트(PET)였다. 스티로폼 박스나 커피 리드에 많이 쓰이는 폴리스타이렌(PS), 포장용 랩에 주로 쓰이는 폴리에틸렌(PE)이 그 뒤를 이었다.
플라스틱 용기에서 배출되는 환경호르몬도 문제다. 노수련 고신대 보건환경학부 교수는 “미세플라스틱은 저위험 독성 물질로 당장 우리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프탈레이트(플라스틱을 부드럽게 하는 화학 첨가제), 비스페놀A(플라스틱 제조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와 같은 환경호르몬이 인체에 쌓이면 암, 성조숙증, 내분비계 및 호르몬 교란, 불임 등을 유발할 수 있다”며 “특히 포장과 배달에 쓰이는 저급한 플라스틱은 위험도가 더 높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텀블러를 ‘다회용 용기’로 다양하게 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SNS상에서는 떡볶이, 호떡 등의 음식을 일회용 포장 용기가 아닌 텀블러에 포장해 왔다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만8000명이 가입한 한 제로웨이스트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은 “매장에서 주는 플라스틱 용기에 뜨거운 음식을 바로 넣을 때마다 환경호르몬에 대한 걱정이 컸다”며 “텀블러에 넣어 오면 따뜻하고 안전하게 먹을 수 있고, 플라스틱 쓰레기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텀블러에 야채를 차곡차곡 쌓아 흔들어 먹는 ‘컵 샐러드’나 회사에 들고 갈 도시락을 텀블러에 담아가면 간편하고 친환경적이라는 글도 많았다.
◇나를 높이는 ‘가치 소비’ = 텀블러를 쓰며 자존감 향상의 효과를 누린다는 이들도 있었다. 시민 강두현(26) 씨는 “사실 텀블러를 생활화하면서도 기후 위기, 탄소 배출 같은 문제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는데, 지난해 거제도 여행을 갔다가 해변에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어쩌면 나의 텀블러 사용이 환경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고 말했다. 강 씨는 “카페에서 텀블러를 사용하면 할인도 쏠쏠하게 챙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4년째 텀블러를 쓰고 있다는 황현아(27) 씨는 “일회용품 대신 텀블러를 쓰려고 노력하는 스스로를 볼 때 자존감도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런 경향은 최근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가치 소비’ 문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2020년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54.1%)이 친환경 제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착한 소비’에 참여한 이유로는 가장 많은 63.4%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를 꼽았다. ‘개념 있는 행동을 하고 싶어서’ ‘심리적 만족감’도 각각 17.6%, 17.2%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박정음 서울환경연합 자원순환팀장은 “‘환경 선진국’에서 발의되고 있는 환경 제도들도 시민들의 일상적 실천과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시민들이 나를 위한 행동으로 텀블러를 사용하고 친환경 습관을 생활화한다면 자연스럽게 제도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린아 기자 linay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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