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언론의 싹을 틔운 조선 최초의 신문 [역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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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가 창간됐다.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이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개화파 인사들은 신문이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고 국민의 의식을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시도였지만, 언어, 정치, 내용, 기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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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가 창간됐다.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이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고 부득이 개항을 하게 됐다. 개항과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새로운 사상과 지식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다. 이에 서구 열강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의 근대화가 시급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에 개화파 인사들은 신문이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고 국민의 의식을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신문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사상을 소개하고, 국민들에게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주려고 했다. 또한 신문을 통해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국가 발전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한성순보는 엄밀히 말하지면, 정부의 관보였다. 따라서 조정의 공고를 전하고,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나 법령 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사회 변화와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을 보도했다. 아울러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소식도 전달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한성순보는 순한문체로 월 3회 발행됐다. 당시 대다수 백성이 한문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독자층은 양반이나 지식인층에 한정됐다. 또한 정부 주도로 발행된 신문이었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는 어려웠다.
한성순보는 갑신정변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1년여 만에 폐간되어, 장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시도였지만, 언어, 정치, 내용, 기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 조선 사회의 상황과 관련이 있으며, 후대 신문들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됐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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