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리스크가 된 이창용의 오버 스펙
‘오지랖’ 비판 벗어나려면 경기 진단과 예측력 높여야
2022년 4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취임했을 때 내심 “오버 스펙(over spec·자격 과잉)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역대 총재 가운데 이력이 가장 화려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버드대 박사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다. 이론만 밝은 게 아니라 실무 경험도 넘친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국내 관료 생활을 했고, 국제기구인 ADB(아시아개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IMF(국제통화기금) 아·태 국장으로 11년을 지내 국제 감각도 갖췄다.
국제적 명성에 걸맞게 그는 임기 첫해부터 세계 중앙은행 총재들의 연례 심포지엄인 잭슨홀 미팅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섰고,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도 수시로 만나며 한은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기 2년 차인 지난해부터는 본업인 통화정책에 머물지 않고 노동·농업·교육 등 다른 영역의 구조 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육아와 간병 등 돌봄 서비스 부문의 인력난을 완화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활용하되,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 비용 부담을 낮춰야 한다고 했고, 사과 값이 급등하자 농산물 수입 개방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 집값을 잡으려면 상위권 대학들이 강남 학생을 적게 뽑고 지방 학생 선발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수십 년간 굳어진 제도를 혁파하자는 그의 파격적 주장에 노동·농업·교육계뿐 아니라 관계 부처들까지 반발했다. ‘오지랖 한은 총재’라는 별명과 함께 “통화정책이나 똑바로 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반면 “용기 있게 옳은 소리를 했다”는 응원도 적지 않았다. 그가 지적한 구조적 문제들이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과 농산물 가격, 집값 상승은 기준금리 변경만으로 잡기 힘든 변수로, 한은의 임무인 물가 안정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통화정책과도 연결돼 있다.
하지만 이 총재의 오지랖은 당분간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3분기 성장률(0.1%)이 한은 전망치(0.5%)를 크게 밑도는 쇼크로 한은의 경기 진단과 예측 능력이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망 실패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은은 올 1분기 성장률을 0.5~0.6%대로 전망했지만 결과는 1.3%였고, 2분기 마이너스 성장도 예상 못 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듯, 실수가 누적되면 실력을 의심받는다.
이 총재의 기세도 많이 꺾였다. 지난 5월 1분기 전망이 빗나갔을 때는 “전망이란 자연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다”고 항변했지만, 지난 29일 국정감사에서는 “전망이 틀려서 당황스럽고 유감이다. 더 개선하도록 노력하겠다”며 고개 숙였다.
이 총재 말처럼 경기 전망은 쉽지 않은 영역이다. 하지만 어렵다고 실패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진단과 예측이 잘못될 경우, 경기가 과열일 때 돈을 풀어 거품을 키울 수 있고 반대로 경기를 부양해야 할 시점에 긴축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은의 경제 전망은 기업들이 사업 계획을 짤 때 참고하는 주요 자료이기 때문에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머리만 좋다고 공부 잘하는 게 아니듯 오버 스펙도 성공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과도한 자신감이 노력을 적게 하고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결과를 망칠 수 있다. 기업들은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재주가 너무 많으면 본업에 집중하지 않고 쉽게 이직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오버 스펙을 선호하지 않는다.
잇따른 헛발질 전망으로 이 총재의 오버 스펙도 위험 요소로 부각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 리스크를 관리하는 출발점은 한은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조 개혁 주장도 힘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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