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윤수일에서 로제까지… K아파트를 다시 볼 때다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 많은 이들이 ‘아파트 공화국’을 들 것 같다. 이 용어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분석한 동명의 저서에서 유래했다. 그는 유럽에서 아파트가 서민 주택, 심지어 우범지구의 상징이 된 반면,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중산층의 지위를 보여주는 피라미드형 계층화의 지표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줄레조의 저작이 출간된 이래로 한국의 도시 공간과 사회를 분석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 ‘아파트 공화국’의 폐해를 입을 모아 지적했다. 요컨대 아파트 비판론에 따르면, 아파트 열풍 때문에 한국의 도시 경관은 흉측해졌으며,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공동체를 해체했고, 사람들은 고립됐다. 게다가 단지에 따른 계급의식이 생겨나고, 아파트만을 목적으로 삶의 시간표가 재편되며 부가 투기 영역에만 집중된다.
그런데 나는 5년 전에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서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택시에서 기사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며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나를 한국인이라고 소개하자, 그 택시 기사는 갑자기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저것도 한국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한국 아파트! 아스타나에서도 부자들만 살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아”라며 웃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한국 건설사 동일토건이 카자흐스탄에 진출해 지은 한국식 프리미엄 아파트 단지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도 한국 건설사들이 더 큰 스케일로 ‘몽탄신도시’를 짓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에 소개됐다. 한국 기업 진출이 활발한 베트남도 예외는 아니다.
이 나라들과 한국이 공유하는 역사·문화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 나라는 모두 소련식 공산주의를 따른 경험이 있는 나라였다. 소련 체제는 국가가 나서서 농촌 인구를 도시로 이주시키는 이촌향도를 장려했다. 소련이 보기에 가장 빠르게 직주근접과 복지까지 통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주거 형태는 아파트였다. 소련인들은 아파트에서 직장으로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입주민 모임을 가지는 삶에 익숙해졌다. 사회주의 사회에도 계층은 있었기 때문에, 배급받을 수 있는 아파트의 종류도 차등화되었다. 당에서 우대하는 인물들은 좋은 위치의 널찍한 고급 아파트에 살았고, 청년들은 방음이 안 좋은 비좁은 아파트도 배급받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저가 아파트도 개인 공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도시 중산층의 상징이 되며 소련 청년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냉전 시대에 체제는 서로 달랐지만, 공산주의 세계의 일상은 우리 한국인들이 겪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풍경과도 흡사한 면이 많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산권의 아파트 문화는 구 공산권 국민들이 한국식 아파트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기초가 됐다.
사실 국가가 이끄는 압축적 근대화는 동구권과 한국만의 특성은 아니다. 넓게 보면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공통 경험에 가깝다. 이 ‘아시아적 특성’은 아파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신파’와 멜로디가 돋보이는 ‘뽕끼’ 음악, 혹독하다는 아이돌 연습생 시스템까지. 서구권에서는 이를 ‘독특하다’고 평했다. 하지만 전통 문화를 마음속에 여전히 간직한 채 현대 도시로 빠르게 이주해야 했던 많은 아시아인들에게는 바로 그런 게 ‘정상’이었다. 한국 드라마와 대중가요는 아시아만의 감각을 시장에서 밀어붙이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물론 대중문화와 도시 공간의 문제를 같은 방법으로 풀어나갈 수는 없다. 아파트 공화국이 대한민국 전체의 지속 가능성도 위협하고 있다는 근래의 상황은 해결돼야만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걸어온 길과 삶의 터전을 긍정하고 그곳에서 보편성을 발견해내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파트 공화국’을 척결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윤수일의 ‘아파트’부터 로제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인의 열망과 애수, 추억을 모두 담아내는 삶의 기반이자, 모든 아시아인의 보금자리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바로 그럴 때 아파트와 반(反)아파트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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