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2] 당신의 용은 안녕하십니까

정수윤 작가·번역가 2024. 10. 3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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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이슬이여

구멍에는 분명히

용이 들었다

つゆさむ あな りゅう

露寒や穴にはきっと龍がいる

찬 바람이 부니 뱀의 구멍이 열리는 계절이 왔다. 입동이 다가오면 개구리나 뱀처럼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변온동물은 살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 준비를 한다. 나는 숲길을 걷다가 흙바닥에 뚫린 주먹만 하게 동그란 구멍을 발견할 때마다 그 안으로 기다란 몸을 구불구불 집어넣었을 뱀의 차고 미끄러운 피부를 상상한다. 긴 시간 잠을 자야 하니 맛있는 걸 많이 먹고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까. 구멍의 크기로 뱀의 허리둘레를 가늠해 본다. 꽤 큰 녀석이다. 먹이를 구하러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녀석과 마주쳤다면 나는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질러댔겠지. 뱀으로서도 올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소란스럽게 보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 소중한 잠의 문은 사람들이 모두 잠든 만추의 어느 깊은 밤 열릴 것이다.

그런데 공원에서 무심코 밟은 뱀이 “나는 너의 엄마다”라고 하며 집 안으로 따라와 천장에 들러붙는 기괴한 소설 ‘뱀을 밟다’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66)는 늦가을 구멍 속에 뱀이 아닌 용이 들었다고 노래했다. 소설가로 더 유명하지만, 하이쿠 동인으로 활동하며 ‘기분 좋은 강아지’라는 하이쿠집도 낸 시인이다. 아침저녁으로 찬 이슬이 서리인가 싶을 만큼 쌀쌀한 계절. 땅에 난 구멍에 뱀이 아닌 용이 들어 있다니. 그것도 ‘분명히’라는 부사까지 넣어 강조한다. 어째서 용일까? 용맹하게 하늘을 날아다녀야 할 상상 속의 용이 땅 구멍 속으로 숨었다니. 그만큼 추웠나? 무엇이 무서웠나? 아니면 시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용이 잠자고 있다고, 용처럼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나?

갑진년도 이제 저물어간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푸른 용의 해. 내년은 을사년, 푸른 뱀의 해. 이제 두 달 남짓이면 우리의 용이 뱀에게 자리를 내주고 시간의 저편으로 날아갈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올해 이것저것 계획도 많았고 야심도 컸는데, 바쁘게 살면서 이룬 것도 있고 미처 다 이루지 못한 것도 잔뜩 있다. 뒷심이 부족한 탓인지 이맘때면 지쳤다, 지쳤어, 그런 생각이 가득하다.

이도 저도 다 놓고 뱀을 따라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나의 용은 오늘 밤, 구멍 바로 앞까지 하강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서울의 도심 위로 낮게 날아올랐다. 나의 용이 울며 투정을 부린다. 허리도 아프고, 할 일은 많고, 눈도 침침해. 힘들어, 힘들다고. 내가 달래며 말했다. 올해 정말 고생 많았어. 하지만 아직은 지지 말자.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줘. 구멍에서 휴식을 취하는 건 뱀에게 바통을 넘겨준 후에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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