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윌밍턴, 트럼프, 평택

기자 2024. 10. 3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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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밍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미국의 이 도시는 워싱턴에서 남쪽으로 600㎞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의 작은 항구다. 극우포퓰리스트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을 ‘돈 버는 기계’라고 조롱하며 한국이 방위부담금을 현재보다 10배는 더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미국역사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워싱턴에 와 있던 나는 뉴스를 듣자마자 짐을 싸서 윌밍턴으로 향했다. 6시간 밤길을 달려 윌밍턴에 도착하자 여명이 밝아왔다. 목적지인 ‘1898년 추모공원’에 노 6개를 거꾸로 세워놓은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은 미국정치사, 특히 현 미국 대선국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미국은 한국 등과 달리 쿠데타가 없었던 나라로 알고 있다. 사실이 아니다. 미국도 성공한 쿠데타가 있었다. 바로 1898년 윌밍턴이다. 남북전쟁으로 노예들을 해방한 뒤 남부의 중심부였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 등에서 아프리카계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빠르게 향상됐다. 공직에도 진출해 윌밍턴에 남부 최초로 백인·아프리카계 등의 ‘혼합정부’가 출범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민주당원 등 백인 2000여명이 무장하고 정부를 해산시켰다. 시의원들을 추방하고 아프리카계 언론사, 기업들을 불 지르고 300여명의 아프리카계를 살해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해방된 아프리카계를 다시 철저하게 배제하기 위한 남부의 각종 법제정이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잊힌 윌밍턴을 다시 소환한 것은 트럼프다. 그는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하고도 부정선거설 같은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대통령직을 이용해 선거결과를 뒤집어 계속 집권하려는 궁정쿠데타를 시도했다. 윌밍턴 120년 만에 또 한 번 극우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실패했다.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그가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고 재선 가능성이 높다니, 미국만이 아니라 한반도와 세계가 걱정이다. 그의 인터뷰를 읽고 갑자기 윌밍턴에 가야겠다는 충동을 느낀 것은 그의 쿠데타, 이를 개의치 않고 트럼프에 열광하는 미국 대중의 한심한 법 불감증 때문만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주한미군 관련 발언이다. 발언에 대해서는 CNN 등이 트럼프가 주요사실에서 32개나 틀렸다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주한미군이 4만명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2만명대이며 분담금도 40~50%를 한국이 내고 있고 바이든 정부 들어 분담금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지적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윌밍턴에 서서 트럼프의 망언을 생각하고 있자 떠오른 것이 또 다른 항구였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항구 평택이다. ‘여명의 황새울 작전.’ 노무현 정부는 2006년 5월4일 새벽 1만명의 무장경찰을 대추리로 진입시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을 끌어냈다. ‘아시아 최대의 미군기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이 기지는 반경 20㎞ 안에 육해공군기지가 모여 있는 ‘완성형 기지’로 전략가치가 엄청나다. 가까운 내리문화공원에 올라 발밑에 펼쳐진 평택기지, 그리고 그 너머 서해를 보고 있으면, 트럼프를 둘러싼 방위분담금 논쟁이 얼마나 피상적인가를 깨닫게 된다.

주한미군기지가 미국 주장처럼 오직 북한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어서 우리가 방위비를 더 내야 하는 것이라면, 왜 강원 양구가 아니라 하필 중국을 마주보고 있는 평택에 지었는가? 고차원적인 분석을 할 필요 없이, 평택미군기지는 북한을 감시·견제하기 위한 기지이지만 동시에 미국에 대한 21세기 패권의 최대 도전자인 중국을 감시·견제하기 위한 기지이기도 하다. 고작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에 아시아 최대의 미군기지를, 그것도 중국을 마주보는 평택에 만들었다는 말인가? 북한 견제는 평택기지의 부차적 기능이고 주 기능은 중국견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이 어느 나라에서 평택같이 전략적으로 뛰어난 대중국기지를 지을 수 있겠는가? 사실 노무현 정부가 대추리 주민들을 몰아내고 평택을 내줄 때 미국에 기지사용료를 요구했어야 했다. 노 정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지만, 이제라도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의 말도 안 되는 주한미군 분담금 증액 요구에 끌려다니지 말고 당당하게 대중국기지 사용료를 요구해야 한다. 설사 사용료를 받지 못하더라도 트럼프식 주장을 꺾어버려야 한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트럼프식 주장을 이 같은 카드로 받아칠 배짱이 있느냐는 것이다. 트럼프 말을 빌리자면, 동맹방위도 “사업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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