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나무는 땀을 흘리지 않는다

기자 2024. 10. 30.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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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계수나무다. 길을 걷다 무심결에 혼잣말이 나왔다. 걸음을 멈춰서 보니 잎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인 벚나무 잎과 부드러운 심장 모양인 계수나무 잎이 떨어져 섞여 있다. 가을인가 보다. 그런데 계수나무 잎이 사뭇 창백하다. 광합성을 끝낸 식물은 대개 잎에 붉고 노란 색소를 머금은 채 한 해를 마감한다. 고개를 들어 본 나뭇잎은 단풍이 들어간다기보다 말라비틀어져 떨어질 순간을 기다리는 듯하다. 처연하다. 다들 지난여름 고생했다, 또 혼잣말이다.

맥문동의 열매가 비췻빛에서 검은빛으로 색을 바꿔 영롱한 자태를 뽐낸다. 그렇지만 그 열매는 드문드문 열려 찾아보기 어렵다. 단풍이나 열매 모두 지난 시절 광합성의 결과물이다. 계수나무의 창백한 잎과 드물게 달린 맥문동 열매는 광합성의 모자란 생산성을 반영할 뿐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덕에 얼마 전의 더위가 언제 일이더냐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돌이켜보면 올여름은 길고 정말 더웠다. 더위는 식물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우선 겉모습을 보면 고온에서 잎 가장자리는 그슬린 것처럼 갈색으로 바뀌고 끝을 구부려 말린다. 열과 가뭄이라는 스트레스에 맞서 식물은 잎의 크기를 줄이거나 모양과 색을 바꾼다. 빛에 노출되는 표면적을 줄이고 물을 지켜 잎 안의 온도를 낮추려는 방책이다. 식물 전체로 보면 잎을 일부 떨어뜨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잎의 수가 줄면 기공과 줄기에서 수분 손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더우면 뿌리도 잘 자라지 않고 꽃도 쉽게 떨어진다. 과일의 생산성도 줄어든다. 왕성하게 자라는 시기인지 또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기인지에 따라 더위 피해는 식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정상적으로 자라는 온도인 20~30도보다 약 5도가 높으면 식물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기공을 열어 물을 수증기로 날려 보내면서 버텨보려 하지만 더위가 지속되면 기공을 닫고 물을 아껴야 한다. 그러나 기공을 닫으면 세포 내부의 온도가 더 올라간다. 그러면 세포막을 구성하는 지방산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집 안 담벼락이 흔들리는 격이다. 이온이 드나드는 통로가 열리면서 칼슘이 세포 안으로 들어와 위험 신호를 알린다. 세포는 열충격 단백질을 만들어 단백질의 구조가 흐트러지지 않게 붙든다. 엽록소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막에 박힌 엽록소도 비틀거린다.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효소인 루비스코도 서서히 작동을 멈춘다. 효소가 작동하는 최적 온도를 넘어서는 순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제는 물을 깨서 전자를 얻는 작업도 멈추어야 한다. 갈 곳 없는 전자가 산소에 달라붙어 활성을 띠면 세포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둘러 채비를 차려야 한다. 세포의 이온 균형을 맞추려면 삼투 조절제도 충분히 만들어야 한다. 항산화 단백질을 만들어 활성산소의 준동을 막아야 한다. 모두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포화지방산을 더 만들어 세포막을 재건하고 단백질이나 염색체 모두 골격이 흐트러지지 않게 호르몬과 유전자 모두 비상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식물 입장에선 광합성 장치가 든 잎이나 물과 영양소가 흐르는 줄기와 뿌리가 생식기관인 꽃이나 열매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렇기에 꽃을 이루는 세포에 유전자 돌연변이가 생겨도 식물은 이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호르몬을 보내 꽃을 떨어뜨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더위나 가뭄 같은 스트레스에 꽃이 떨어지는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생존 우선 법칙에서 비롯된다.

이제 식물은 낮 더위를 피해 아침과 저녁 짧은 순간에 광합성 공장을 가동해야 한다. 그렇지만 더위가 이어지면 식물이 만드는 설탕의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꽃가루를 수정할 벌과 딱정벌레에게 줄 꿀도 단맛이 줄어든다. 사과나 배도 한결 맛이 떨어진다. 생존에 온 힘을 쏟다 보면 어떤 기능은 허술하기 마련이다. 더위나 가뭄 스트레스가 심하면 식물의 면역 활성도 현저히 떨어진다. 중국 남부의 벼를 쓰러뜨린 벼멸구가 바람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와 온 나라의 논농사를 망가뜨렸다. 큰일이다.

식물의 생산성이 줄어들면 그 식물에 기대어 사는 모든 생명체가 다 힘들다. 야생 동물들, 닭과 축사의 돼지, 소 등 모두가 힘들다. 지구에서 탄수화물을 만드는 생명체는 오직 식물뿐이다. 그 식물들도 올 한 해가 힘들었다. 땀을 흘리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대서 모를 리가 없다. 쭉정이 열매와 달지 않은 과일, 그리고 창백한 계수나무의 잎과 타는 지구.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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