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양귀비 이야기
국정 문란의 도화선 역할, 안록산 난 중 비참한 최후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인구에 회자되는 당나라 시대 절세의 미인 양귀비는 일찍이 제6대 황제인 현종 7년(719) 사천성에서 태어났다. 16세가 되면서 꽃처럼 피어난 그의 미색은 천리향이 되어 당나라 수도 장안, 즉 지금의 서안까지 2000리에 사무쳤다. 그래서 현종의 제18 왕자인 수왕 이모의 후궁이 되었다. 수왕의 모친은 현종이 언제나 애틋하게 사랑하던 무혜비였으므로 수왕 또한 아버지 현종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러나 현종이 54세가 되던 해, 무혜비가 신병으로 죽었으므로 상심한 현종이 애탄 개탄하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조차 애절할 지경이었다. 당시 궁에는 1000명이 넘는 궁녀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현종의 시름을 달래줄 수 없었다.
현종의 우울함이 정사에 많은 해를 끼침을 알고 있던 정승 반열의 신하들이 천신만고 끝에 절세의 미인이며 음률을 교양으로 지닌 그윽한 품위의 매력적인 여인을 찾아냈다. 이 여인이 바로 현종의 18왕자인 수왕의 계비였다. 현종이 신하들과 함께 수왕의 집을 방문해 이 환상의 여인을 직접 살피고 첫눈에 반해버렸으므로 조정에서 이 여인에게 의향을 물어 여관(女官)이란 관직을 내리고 이름을 고쳐 태진(太眞)이라 했다. 이런 운명의 장난은 고금동서를 통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섭섭해하는 수왕을 위로하기 위해 벼슬이 장군 반열에 올라 있는 위소훈의 예쁜 딸을 물색해 대신 수왕의 계비로 보냈다.
그런 후, 아무도 모르게 태진을 궁중으로 데리고 왔는데 태진이 요염하고 교양 있는 품성으로 현종을 섬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무혜비보다 더 깊이 사랑하게 됐다. 때문에 궁중에서는 그녀를 황후로 인정하고 그 예절로 섬겼다. 이 황후가 곧 양귀비이다. 그녀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의 화청궁이라 불리는 온천에서 매일 목욕을 했는데, 그 시대를 이어 살았던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는 이때 양귀비의 관능적 모습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부는 날 화청지에서 목욕을 허락받았네. 온천물에 매끄럽고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씻는다. 시녀들이 부축하여 일으켜도 그 요염한 몸엔 힘이 빠져 휘청거리네. 비로서 처음 은택을 받은 그 다음 날 정경이라네….”
양귀비는 매일 온천을 즐겼는데 목욕을 마칠 때마다 축 늘어져 시녀들은 그녀를 보살핌에 수고로움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지난날 남편의 아버지인 현종에게 시집와서 귀비가 된 처지에 대해 아무리 당찬 여인이라 해도 발이 떨려서 시녀의 부축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초현실적 사건은 양귀비의 나이 26세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대당제국은 이때를 고비로 정치가 어지러워져 점차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궁정의 실권은 이임보라는 영의정승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현종은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국정에 관한 정열은 식고 남은 것은 오직 음악에 대한 취미와 사랑의 즐거움만 탐하는 노인이 돼버렸다.
세월이 급히 가고 있는 길목에서 당나라는 푸른 눈의 붉은 수염을 가진 지금의 북경 지역 절도사 ‘안록산의 반란’을 맞게 돼 절망의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양귀비는 사촌오빠 양국충을 현종에게 천거했는데 오래되지 않아 그녀의 요청으로 우의정에 오르면서 수시로 안록산이 모반할 것이라고 현종에게 고해바쳤다. 지금의 북경인 동평군왕으로 재직하고 있던 안록산 역시 현종과 양귀비의 양아들로 중앙의 집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차에 양국충에게로 현종의 전권이 쏠리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상황은 종국에는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안록산은 755년 2월 서둘러 15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서쪽으로 진격, 756년 정월 장안에서 200㎞ 떨어진 동관까지 진출했다.
양국충은 정승으로 출세는 했지만 무능한 인물이었으므로 다가오는 반란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안록산의 반란군이 장안을 압박해 옴에 따라 드디어 현종은 사천을 목표로 피란길에 올랐다. 장안을 떠난 그 이튿날 아침 ‘마외’라는 한 시골 역에서 피란행렬이 출발하려던 순간 호위 무사들이 칼을 빼어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의 일행 중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의 목을 베지 않으면 피란을 계속할 수 없다고 했다. 드디어 양국충과 그의 누이들의 목을 베었으나 호위군들은 또다시 양귀비마저 죽이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고 새로운 제안을 해 왔다. 현종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낸 호위병의 대장 고력사가 마외 역 앞에 서 있던 배나무 큰 가지에 명주 띠를 걸어 양귀비의 목을 매달았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고 현종은 71세였는데 현종이 오른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가는 양귀비를 곁눈질로 힐끗힐끗 바라다보는 순간 호위대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재촉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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