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포장으로 위장한 개악 [왜냐면]
이재훈 |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 ‘저주 토끼’ 첫 문장이다. 화려한 겉포장에 속으면 안 된다. 정부 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4일 윤석열 정부는 연금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상생의 연금개혁안”이라 이름 붙였다. 노후소득 보장, 세대 간 형평성, 지속가능성을 위한 개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좋은 말로 포장한 수준을 넘어 과장에 가깝거나 개악을 위장하고 있다.
먼저, 자동조정장치는 자동 삭감장치다. 국민연금은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연금액을 인상하면서 실질가치를 보전해준다. 사적연금에는 없는 국민연금만의 강점이다. 하지만 정부안대로 자동조정장치가 도입되면, 물가상승률에서 가입자 감소율과 기대여명 증가율을 반영해 뺀다. 저출생으로 가입자는 점차 줄고 평균수명은 늘어나니, 물가상승률보다 더 낮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전년에 받았던 연금액보다 줄어드는 것이다.
정부는 인상률 하한을 0.31%로 정해 전년보다는 많이 받도록 하겠다지만, 물가상승률이 2%일 때 0.31% 인상하면 현재보다 1.69% 덜 받는 셈이다. 복리효과를 고려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삭감 폭은 더욱 커진다. 전진숙 의원실은 자동조정장치가 도입되면 세대별로 총연금액이 15~16% 삭감되고, 기대여명 말기엔 30% 이상 삭감될 것으로 분석했다. 소득대체율을 42%로 하더라도 무력화될 뿐더러 삭감 폭도 크다. 게다가 초고령 노인일수록 빈곤율이 높은 것을 고려하면 치명적이다.
정부는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24개국이 자동조정장치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 국가의 평균 소득대체율은 51.2%로 한국(31.2%)보다 높다. 게다가 적립식 확정기여 방식의 사적연금으로 운영하는 국가까지 포함하고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연금 성숙기에 미세조정 역할을 하는 것과 달리, 소득대체율이 낮고 노인빈곤율이 높은 한국의 상황에서 자동조정장치는 안정적 노후 생활을 위협할 뿐이다. 특히, 자동조정장치는 사회적 논의나 입법 과정 없이 자동으로 연금액을 삭감하면서 가입자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탈정치화라는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갖는다.
두번째는 세대별 보험료 차등 인상이다. 정부는 13% 보험료율 인상안을 제시했는데, 청년과 미래세대의 부담을 완화하고 세대 간 형평성 제고를 위해 세대별 보험료 인상에 차등을 두겠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세대 갈등만 조장하고 있다. 50대 최저임금 노동자의 보험료율을 20대 대기업 노동자보다 더 빨리 올리는 게 형평에 맞는 것일까. 차등 인상의 경계에 있는 1975년생과 1976년생, 1985년생과 1986년생, 1995년생과 1996년은 다른 세대인가. 이른바 한끗 차이로, 소득이 같아도 매달 내는 보험료를 8년 동안 차등한다는 게 합리적인가. 공적연금을 운영하는 세계 186개국 중에서 세대나 나이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적용하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 “세계연금사에 최대 코미디로 기록될 것”이라는 평이 나올 만하다.
게다가 정부의 보험료율 13% 인상안은 42% 소득대체율을 전제하고 있다. 가입자단체와 공론화위원회의 다수 의견인 50%와는 거리가 멀다.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은 패키지 요구인데, 보험료율 13%는 합의점을 찾은 것처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특히 보험료 인상은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상황에서,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다. 현행 보험료도 63.4%가 부담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보건복지부 2019). 저임금노동자나, 전액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지역가입자는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루누리 보험료 지원사업은 신규가입자만 지원하는 것으로 변경하면서 예산이 2019년 1조1600억원에서 반 토막 난 상태다.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은 대상과 기간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특히 특수고용노동자의 직장가입자 전환은 언급조차 없다.
국민연금은 기금소진이 곧 제도 파산인양 호도하는 재정안정론자들의 저주와 같은 주술에 갇혀 있다. “기금이 소진되어 나중에 못 받을까 봐 불안”하다는 의견이 53.6%였다(국민연금공단 2023). 여전히 국민연금을 폐지하자는 댓글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국민연금을 통해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이 국민연금을 대체할 수 없다. 정부는 자동조정장치와 세대별 차등인상안을 폐기하고, 공론화위원회의 결과와 의미부터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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