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경성의 `가을 놀이터` 다섯 곳

2024. 10. 3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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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물통 메고 함께 오르는 남산 봉우리 성스럽고 고요한 탑골승방 여승들 북한산 훤히 보이는 물맑은 세검정 아이들 놀기 딱 좋은 장충단·동물원 각양각색의 청량사·영도사·안정사

가을!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온 산에 물든 단풍과 낙엽만으로도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다. 1924년 9월 매일신보는 닷새에 걸쳐 '가을 놀이터'라는 제목으로 가을에 나들이할 만한 경성의 다섯 군데를 소개했다. 100년 전 가을 놀이터를 찾아 함께 나들이를 떠나 보자.

첫 번째는 '남산 봉우리'다. "한여름 동안 지루한 더위에 삐치고 난 30만 시민에게는 서늘한 금풍(金風, 서풍)과 맑은 달빛의 가을철이 소식도 없이 돌아왔다. 한가한 하루 날을 택하여 상쾌한 강으로 놀이를 어디로 갈까? 다정한 친구끼리 그리운 사람이며 어린 동생이나 바느질, 빨래나 시키던 어진 아내를 위로하기 위하여 어느 곳을 향하겠는가. 금강산의 추색(秋色)이며 개성의 밤 줍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같은 호강스러운 놀이는 주머니 속이 풍족한 이들에게 맡길 일이요 우리는 따로 가장 적은 비용으로 하루 동안을 재미있게 놀아볼 문안 문밖의 가을 놀이터를 찾아 볼 것이다."

기사는 이어진다. "역사가 있은 이래 조선과 그 서울을 가장 엄숙히 가장 안타깝게 지켜 온 거룩한 이는 가을의 은택이 영롱히 빛나는 저 남산(南山)일 것이다. (중략) 세 사람 혹은 5~6명이 각각 점심과 물통을 메고 남산을 향하여 떠나 나설 것이 다 남산 공원을 얼른 지나 차차 낮아가는 대(大)경성을 돌아보며 '너도 내 눈앞에 깔릴 때가 있구나'하며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자손의 명복을 비는 와룡당(臥龍堂)도 있으며 한참 때를 맞는 송이버섯을 다투어 찾아가며 차츰차츰 올라가면 어느덧 발길은 봉수(峯首)에 이르러 멈추어진다. 일국의 명맥 같은 통신을 다만 한 가지 횃불로써 끌어가던 옛날이야기도 끝이 없을 것이며, 경성(京城)! 거기서 죽느니 사느니 하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시민들의 개미 같은 꼬락서니를 남의 일같이 가엾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며 남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흐름을 향하여 억울하게 죽은 철교 자살자의 가을 넋을 펴 주는 것도 장부의 할 만한 일이었다. (중략) 석양을 등에 지고 오히려 원기가 있거든 말로만 듣던 남소문의 옛터도 볼 겸 경성을 끼고 동으로 내려 장충단으로 돌게 되면, 곳곳이 임자를 기다리는 그윽한 놀이터가 새록새록 발길을 멈추게 할 것이다."

두 번째 소개하는 가을 놀이터는 동대문 밖 '탑골승방'이다. "집안 식구나 데리고 절밥이나 한번 먹었으면 좋겠는데 모두 번잡하여서 갈 수가 있어야지 한탄하는 분에게는 '탑골승방'으로 가시지요 할 것이다. (중략) 전차로 가려면 청량리로 가는 전차가 제사(製絲)회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차장에게 물으면 탄탄한 대로가 익어가는 오곡(五穀) 사이로 꿈같이 선을 이룬 길을 지시할 것이며 걸음을 좀 걷더라도 풍치를 찾아 가려며는 홍수동으로 하여서 지장암 뒷산을 넘어 만호(萬戶) 장안을 굽어보며 채석장 앞을 지나 승방 동구(洞口)로 향할 것이다. (중략) 탑골승방에는 주지 이항탄(李恒彈·42) 이하 꽃같은 청춘을 오직 불경과 염주로써 속절없이 보내는 20여 명의 여승이 있으니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송은영(15)과 남에게 말 못 할 사정을 품은 이업순(16)의 애처로운 남복(男服)은 보는 이의 눈물을 끌고 있다! 한 상에 70전짜리 밥으로 배를 채울 때 술 생각 고기 생각만 잠깐 접어놓으면 그 정갈스럽고 맑은 절 음식은 가히 인간 세상을 떠나서 맛보는 느낌도 얻을 것이다. (하략)"

세 번째 놀이터는 '세검정'(洗劍亭)이다. "고결한 단풍 가지가지가 사람의 정신을 쇄락(灑落)히 하는 가을의 세계는 어디가 찾을까? 관악산이겠는가? 금강산이겠는가? 아니다. 가을의 성전(聖殿)은 이미 정평이 높은 북한산 일대이다. (중략) 다정한 친구끼리 날을 택하여 술과 안주며 점심을 나누어 짊어지고 가벼운 차림이 날기라도 할 듯이 원기있게 창의문(彰義門)을 향하여 지팡이를 끌 것이다. 창의문 언덕을 내려서며부터 눈앞에 열려가는 명승과 고적은 실로 대하는 이의 가슴에 차고 기에 넘칠 것이니, (중략) 한 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라! 맑게 갠 가을 하늘에 청초(淸楚)하게 솟아 있는 인수(仁壽), 노적(露積), 백운(白雲)의 세 봉(峯)이 오만하게 내려다 보지를 않는가. 동남으로 벌려 있는 연산(連山)들이며 서쪽으로 떠 있는 황해(黃海)의 모든 섬들을 보고 누가 '좋다!' 소리를 치지 않고야 차마 견딜 수 있겠는가?"

네 번째 소개하는 가을 놀이터는 '장충단'과 '동물원'이다. "탑골승방이고 북한산이고 모두가 어른의 놀이터만 찾아 온 붓끝은 다시 어린이들을 위주한 가을 놀이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중략) 야위어 가는 녹음의 병든 잎들이 곳곳에 나부낄 때에 누렇게 되어 가는 금잔디 폭의 한 바닥을 택하여 자리를 잡고 숨바꼭질, 꽃 꺾기를 마음껏 터놓아 주면 얼마나 그들은 즐겁게 놀겠는가? (중략) 다음에 동물원도 가을 맞이가 한참이다. 동물원의 어린이 접대 주임 노릇을 맡아서 보는 원숭이 떼를 바라보는 아가씨 도련님을 무슨 재주로 막을 수나 있으며 식물원 뒤 언덕 금잔디와 동물원 한복판이며 박물관 부근 언덕에도 가을의 자취는 점점 짙어가는데, 때맞춰 점심이나 먹여 가며 아기네들에게 자유를 주어 보라! 이 나무 사이 저 잔디 위로 달음박질도 하고 뛰기도 하며 얼마나 재롱스러운 하룻날을 유쾌히 보내겠는가. (중략) 어린이를 위하자. 인간 중의 가장 착하고 어진 사람인 어린이를 위하여 하룻날의 놀이를 찾아주자! 그것은 결코 쓸데없는 일이 아닐 것이며 당치 않은 일도 아닐 것이요 오직 어버이 된 이의 행할 바 직분이요 의무일 것이다."

다섯 번째 가을 놀이터로 청량사(淸凉寺), 영도사(永導寺), 안정사(安靜寺) 등 세 곳의 절을 추천했다. "경성 부근의 가을 놀이터로는 동대문 밖 청량사, 영도사이며 광희문 밖 안정사가 아마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양기가 돌고 마음을 호탕히 갖게 하는 곳은 영도사가 으뜸일 것이요, 번잡한 중에서도 오히려 조용하고 아늑한 맛은 청량사에서 취할 것이며 제법 속계(俗界)를 떠나 선경(仙境)에 노는가 하는 느낌을 주는 듯한 곳은 안정사인가 한다. (중략) 익어가는 오곡의 엄숙한 풍경이며 물들어가는 단풍의 빛 고운 맵시를 쫓아 등성이를 넘어 절 밥을 찾아 영도사를 향하나 청량사를 향하나 배를 두들여 가며 싫도록 먹고 나서 밥값을 물으면 다만 70전! 70전이라는 돈이 없는 이의 살림에 결코 적은 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밥값 70전, 전차비 왕복 20전 전부 1원이 다 못 되는 돈으로써 하루의 가을 놀이가 충분이 된다 하면 어찌 비싸다고야 하겠는가. (중략) 석양에 쌓인 가을 언덕에 엎어져서 저물어 가는 종소리에 마음껏 기꺼이 울어 보기 위하여서라도 문밖 절 놀이는 우리 시민에게 가장 소중한 값을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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