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시선] 한국 기업 발목 잡는 내수용 정치
과거 산업화 시대, 오로지 잘살아 보자는 목표 하나로 자녀들을 데리고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났던 이민이, 이제는 자산만 해외 선진시장으로 옮기는 계좌이민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방법은 매우 쉽다. 몸은 한국에 있으면서 선진국에서도 앞서간다는 한국 사회의 혜택을 누리고, 자산만 해외에서 굴리고 키우면 된다. 클릭 한 번으로 해외 투자상품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실제 한국 주식시장에 실망한 국내 투자자들이 대거 미국 주식시장으로 옮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건물주에 대한 꿈도 미국 리츠상품 매수로 가능하다. 매월 배당이 나오는 리츠상품도 많아 따박따박 달러로 월 배당을 받을 수 있다. 일례로 한국인 매수 상위를 기록하는 미국 리츠인 리얼티인컴은 매달 배당금을 준다. 연간 배당수익률은 5%를 넘는다. 서울 강남 꼬마빌딩보다 수익률이 좋고 임차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서학개미'들의 진화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은 주식이민 행렬을 더욱 부추길 판이다. 지난 9월 외국인은 국내 상장주식 7조3610억원을 순매도했다. 지난 2021년 8월(7조8160억원) 이후 3년1개월 만에 가장 큰 순매도 규모다. 문제는 앞으로도 계좌이민, 주식이민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쟁에 치이고 국내 정치에 발목 잡힌 한국 기업을 보면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의 미래를 보여주는 게 바로 주가다. 현재 한국 주식시장의 수익률은 전쟁 중인 러시아와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 세계 바닥권이다. 참다 못한 국내 투자자들이 '금융투자소득세'라도 폐지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칼자루를 쥔 더불어민주당은 아직 확답을 하지 않고 있다. 수익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논리지만 제대로 된 경기장을 마련해 주지도 않고 엄격한 규칙만 외치는 형국이다. 국내 주식시장은 울퉁불퉁한 시골길로 방치해 놓고 세금은 아스팔트가 깔린 글로벌 시장에 맞춰 걷겠다는 심보다.
'한국 주식시장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 주식시장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내수용 정치'가 큰 역할을 했다. 최근 삼성전자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그 위기의 시작은 법원이 최순실씨에게 제공한 말 3마리를 뇌물로 판단한 것부터다. 이후 10년간 삼성은 사법 리스크에 놓여 있었다. 지난 2016년 미국 전장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한 이후 더 이상의 굵직한 인수합병(M&A)은 없었다. 총수는 수시로 재판에 불려다녔고, 해외출장을 갈 수 있는지를 놓고 법원의 판단과 여론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사이 엄격한 주 52시간제가 도입되면서 '치열함' 대신 '워라밸'이 대세가 됐다. 조합원 감소에 근심이 컸던 노동계는 삼성이라는 'VVIP 고객'을 확보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22대 국회 첫 국정감사도 내수용 정치에 시달리는 한국 기업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10대 그룹 총수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감 증인으로 신청됐다. 이들을 증인으로 신청한 곳은 다름 아닌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농어업 등의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인 농어촌상생협력기금 출연실적이 저조하다는 것이 소환 이유다.
매년 열리는 국정감사에, 각종 청문회에 대기업 총수를 불러 호통을 쳐야 박수를 받는다는 '내수용 정치'가 있는 한 더 이상의 '글로벌 기업'은 없다. 이제 정부나 국회도 기업은 놔두자. 오죽했으면 삼성전자 재직 시절 갤럭시 신화를 쓴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이 국민의힘 초선의원 공부모임에 강연자로 나서서 이런 말을 했겠나. "제가 40년 있었잖아요. 기업은 안 건드리면 잘합니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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