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고려아연 쟁탈전, 불편한 진실들

이혜진 논설위원 2024. 10. 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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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유상증자, 경영권 분쟁 2막
자사주 동원 경영권 방어 시도 논란
대주주 분쟁 격화되자 ‘밸류업’ 구호
치킨게임에 산업 경쟁력 훼손 우려
[서울경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2막이 올랐다. 앞서 치킨게임식 공개매수 전쟁은 박빙으로 일단락됐다. 자사주 소각을 기준으로 하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은 최대 40.4%,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은 43.9%로 지분율 격차는 3%포인트가량이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양측이 지분 매입에 수조 원의 돈을 쏟아부었지만 누구도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 셈이다. 2차전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영풍·MBK가 임시 주주총회를 통한 이사회 장악을 시도하자 최 회장 측은 30일 2조 5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카드까지 꺼냈다. 그 사이 주가는 널뛰었다. 지난달 초 50만 원대였던 주가가 약 한 달 반 만에 150만 원 부근까지 치솟더니 대규모 유상증자 추진 소식이 전해지자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

법적 테두리 내에서라면 주주들끼리 벌이는 경영권 분쟁에 선과 악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생결단의 극한 대결은 어김없이 후유증을 남긴다. 최 회장 측은 지분 담보 ‘영끌’ 대출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사모펀드를 우군으로 확보한 영풍은 공동의결권·콜옵션·임원선임권까지 펀드 측에 부여하며 화해의 다리를 불질렀다. 내전(內戰)이 더 가혹한 것과 마찬가지로 70년 동업자 가문이 벌이는 회사 쟁탈전은 더 격렬하다.

대주주 간 벼랑 끝 대결 속에 회사의 미래는 뒷전으로 밀릴 우려가 크다.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했던 ‘알짜 회사’ 고려아연은 누가 이기든 경쟁력 저하 가능성과 재무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자사주 매입을 위한 차입 비용, 인수금융에 대한 이자 비용, 투자금 회수를 위한 배당 확대로 재무 안전성이 떨어질 공산이 크다. 한국기업평가는 “경영권 분쟁에 따른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이 과정에 재무 부담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은 첨단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국가기간사업으로 평가받는다. 경영진과 임직원이 모두 분쟁에 휘말려 있으니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회사의 경쟁력 훼손은 불보듯 뻔하다. 양측 모두 미래를 위한 경영의 적임자를 자처하지만 결과적으로 회사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논란거리는 경영진의 자사주 동원이다. 지분율이 낮은 오너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쓰는 단골 수법이다. MBK라는 ‘큰손’을 등에 업은 영풍에 비해 지분율도 낮고 실탄이 부족한 최 회장 측은 영풍·MBK 연합의 공개매수를 저지하기 위해 자사주를 무기로 꺼냈다. 최 회장 측이 제시한 자사주 매입가는 89만 원으로 분쟁 직전에 비해 2배가량 높은 금액이다. 주가가 과도하게 저평가됐을 때 자사주를 사들여 소각하는 일반적인 주주가치 제고 방안과는 정반대다. 실제로 회사는 자사주를 사기 위해 조 단위 빚까지 냈다. 그런데 차입금 상환을 위해 주당 67만 원에 대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하겠다고 함으로써 높은 가격에 산 주식을 더 낮은 가격에 다시 발행하는 ‘꼬인’ 결과를 낳게 됐다.

그렇다고 경영권 쟁탈전에 주체로 등장한 사모펀드가 전적인 신뢰를 받는 상황도 아니다. 특히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국민연금이 선뜻 사모펀드의 편을 들지 미지수다. 사모펀드는 비교적 단기간에 이익 극대화를 꾀하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게다가 국가 핵심 산업을 영위하는 회사의 경영권을 맡길 만큼 사모펀드가 국내에서 신뢰와 평판을 쌓았는지도 의문이다. 이는 앞으로 국내 자본시장에 뿌리내리기 위해 MBK를 비롯한 사모펀드들이 풀어야 할 과제다.

치열한 경영권 쟁탈전 속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 있다. 바로 기업의 밸류업은 대주주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외치는 구호라는 점이다. 고려아연은 평소 주가 제값 받기에 별로 관심이 없던 회사다. 알짜 사업으로 자본을 9조 6000억 원까지 쌓아올렸으나 주가는 장기 횡보해왔다. 경영진은 분쟁의 불이 붙은 뒤에야 주주가치 제고를 기치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주주가치 제고인지 국내 증시의 쓴맛을 봐온 투자자들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우량 회사는 망가지고 머니게임만 난무하는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누군가는 경영권 분쟁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혜진 논설위원 has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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