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0.8% vs 여성 0.09% 유리천장이 강철천장 됐다

2024. 10. 30. 17: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여성 임금근로자의 수는 처음으로 1000만명을 넘어섰고 전체 임금근로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절반에 가까운 46%에 이르렀다. 고용시장 내 여성의 참여율이 높아진 것은 고무적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성별 임금격차와 유리천장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을 면치 못하는 등 질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

특히 은행업에서 여성 임원은 찾아보기가 매우 드문 게 현실이다. 어느 업종에서나 임원은 전 직원의 1%도 되지 않지만, 은행권에서 여성이 임원이 되기 위해선 험난한 길을 거쳐야 한다.

지난해 국내은행의 임원은 4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나 그중 여성은 50명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수치로만 비교해 보아도 남성 임원이 여성보다 무려 8배나 많다. 한 은행당 여성 임원은 고작 2~3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은행원 가운데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일까. 그 답은 '아니요'이다.

최근 국내은행 종사자의 남녀 성비는 거의 5대5 수준이거나 근소하게 여성 은행원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국내 은행원 중 남성은 4만7000명, 여성은 5만5000명 정도다. 그러나 현재 수준의 성별 임원 비중이 유지된다면 남성이 임원이 될 확률은 0.8%인 데 비해 여성은 0.09%에 불과하다. 임원이 되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라면 여성은 9분의 1 수준으로 좁은 바늘구멍을 지나야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서 승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 직원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수익에 직결된 직무에서 커리어를 쌓는 것이다.

은행에서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직무는 대출업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에서는 여신과 관련된 기획, 영업 등의 업무와 여기서 파생된 여신 심사와 관리, 리스크 관리 등이 수익 기여도가 큰 주요 직무다. 즉, 이러한 직무에서 커리어를 쌓고 우수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은행 내에서 임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과거 우리나라 여성 은행원들은 제도적 한계 때문에 대출업무와 같이 은행 수익에 기여하는 주요 직무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0년대 초반, 여성 은행원들에게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을 바탕으로 당시까지 은행에 존재하던 여행원 제도가 사라진 것이다.

당시 대부분 은행의 행원급 직원은 중견행원, 초급행원, 그리고 '여행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견행원은 보통 대졸 학력자를 채용하거나 초급 및 여행원을 승진 임용했고, 이와는 별도로 고등학교 교장의 추천자를 대상으로 남자는 초급행원, 여자는 여행원으로 구분해서 채용했다.

특히 여행원은 동일한 출발선을 가진 남자 초급행원에 비해 임금과 승진 기회 등에 있어 상당한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불리함은 다름 아닌 '직무'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여행원은 예금상담 및 신규, 해지와 같은 수신업무를 수행했다. 또 호봉 간 승급액에 남녀 차이가 있다고 기재돼 있다. 초급직원은 자동승진이 된 반면 여행원은 전직시험, 또는 책임자 고시를 응시해야만 하는 문제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993년 국내 은행에서 여행원 제도는 폐지됐다. 우리는 이미 30여 년 전에 직무의 차별이 임금과 승진에서의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셈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오늘날의 은행을 보면 과연 여행원 제도가 폐지된 것이 맞는지 의문이 생긴다. 현재도 은행 임원의 성비는 9대1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여행원 제도가 폐지된 지 한참 지났어도 성별 직무 불균형이 바뀌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당장 가까운 은행 영업점을 가봐도 입출금을 비롯한 수신업무를 담당하는 은행원은 여성이 대다수고 개인여신, 기업여신 창구로 옮겨가면 여성 은행원을 보기 어렵다.

일반 행원급에서 남녀 성비를 살펴본다면 여성이 65% 수준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계약직 직급에서는 여성이 7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과장급 이상인 책임자급에서 여성은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42% 수준으로 감소하며, 임원급에서는 10% 수준으로 급감한다. 물론 여기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업무에 몰두하기 힘든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인 여러 특성도 반영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재 여성이 겪고 있는 승진과 임금 차별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이제 1000대1이 넘는 경쟁을 통과해 임원이 된 여성 은행원들을 살펴보자. 힘든 경쟁을 이겨내고 임원이 된 여성 은행원들은 과연 직무 불균형에서 자유로울까? 그 답은 여성 임원들이 은행에서 담당하는 업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작년도 외국계 은행을 제외한 국내은행 여성 임원의 직무 중 가장 많은 분야는 바로 '소비자 보호'였다. 그 뒤로 자산관리와 소수의 디지털, 준법, 리스크 관리 등의 직무가 이어졌다. 사실 이 직무들조차 여성의 비중이 '그나마' 높을 뿐이지, 업계 전체로 따져보면 해당 분야 또한 남성 임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 남성 임원들의 직무는 경영전략, 재무기획, 여신 관련 기획과 심사 및 관리, 기관 및 기업영업, 글로벌, 투자금융 및 자본시장, 리스크 관리 등이 주를 이뤘다.

은행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업무가 없다지만, 여성과 남성 임원이 맡는 업무의 차이는 명확하다. 바로 은행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수익'에 직접적인 기여가 가능한 직무인지다.

즉, 회계 또는 재무적인 관점에서 은행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주요한' 업무는 남성 임원들의 비중이 높은 반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지원사업과 후선업무는 여성 임원들의 비중이 높다. 한편 은행 내의 임원들은 대개 차기 은행장 상시 후보군이기도 하다. 이들은 앞으로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경쟁을 통해 가치를 증명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임원으로서 각자 소관 업무를 통해 은행 수익에 얼마나 많이 기여를 했는가이다. 따라서 현재처럼 특정 직무에 치중된 여성 임원들은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한 평가에서 한번 더 불리한 출발선에 서야만 한다. 결국 임원급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성별 직무 불균형은 지속가능한 여성 CEO 배출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금융을 선도하는 주요 글로벌 금융기업들의 임원진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인적 구성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사회의 성비다. 대부분 1명 내외의 여성 이사가 포함된 국내은행과 달리 글로벌 금융사들은 이사회 내에서 여성의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JP모건의 경우 이사회 내 남녀가 각각 5명이며, 씨티그룹은 이사 13명 중 7명, HSBC는 14명 중 8명, BNP파리바는 17명 중 8명이 여성이다. 즉, 전체 이사 정원 중 50% 이상 혹은 그에 근접하는 비율로 여성들이 활동하고 있다.

둘째는 여성 임원들의 직무이다. 상기 회사들은 국내은행들보다 여성 임원 비중 자체도 높지만 각 여성 임원들이 맡고 있는 직무도 다양하다. 최고 재무책임자부터 영업, 리스크 관리, 지역 총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CEO 후보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조직 내 임원의 구성 측면에서 본다면, 여성이 CEO가 되기 어려운 것은 위에 밝혔듯 CEO 후보군인 임원진 자체에 여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원진에 여성이 없는 것은 임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인 직무 배정 자체에 불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명시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성별에 따라 직무를 차별하는 곳은 없다. 하지만 그 차별은 현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를 유리천장이라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근로자에 대한 기회의 평등이 케케묵은 이슈쯤으로 치부될 위험이 높아지는 징후일 수도 있다.

국내 은행업과 금융, 나아가 전 산업을 이끌어갈 여성 리더들을 양성하고 싶다면 문제의 근원과 시작점을 직시해야만 한다. 오늘도 필자는 미래 우리나라의 은행업을 이끌어갈 수많은 여성 은행장들을 기대하며,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말을 조금 뒤틀어 인용하고 싶다.

'바보야 문제는 직무야.'

▷ 강신숙 Sh수협은행장… Sh수협은행의 첫 여성 은행장이다. 1979년 수협중앙회에 입회해 2009년부터 중부기업금융센터장, 강남광역금융본부장, 마케팅부행장 등을 거쳤다. 폐점 직전의 서울 송파구 오금동지점을 맡아 8분기 연속 전국 영업점 평가 1위로 탈바꿈시키는 등 영업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강신숙 Sh수협은행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