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의지’ 대 ‘일반 의지’ [뉴스룸에서]

이세영 기자 2024. 10. 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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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이세영 | 정치부장

한국이 ‘저강도 내전 상태’라는 진단엔 새로울 게 없다. 여의도와 용산으로 상징되는 정치사회는 물론, 우리가 자고 먹고 듣고 말하는 생활세계 도처에서 지루한 참호전이 매일같이 펼쳐진다. 그 배경엔 20년 넘게 이어진 보수와 리버럴의 ‘장기적 힘의 교착’이 자리 잡고 있다. 어느 세력도 힘과 권위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상황. 그러는 사이 시민의 민주주의 체감도는 정권의 행방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국제 평가기관의 진단도 다르지 않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는 박근혜 정부 후반기 180개 남짓한 조사 대상국 가운데 34~37위를 오르내렸다. 문재인 정부 들어 13~18위로 순위를 끌어올렸으나, 윤석열 정부 집권 2년차(2023년)에 28위로 주저앉더니 올해 조사에선 47위로 급락했다(민주주의 다양성(V-Dem) 연구소).

이번 정부 들어 나타난 특징은 정치적 갈등이 과거처럼 ‘의회 내 여야 대결’이 아닌 의회와 대통령실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의회를 지배하는 다수당의 입법권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무력화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정치가 올라탄 것이다. 요컨대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여의도 권력(입법권력)과 ‘부부 의지’의 집행기관으로 전락한 용산 권력(행정권력)이 가파르게 대치하는 ‘이중권력’ 상황이다.

문제는 이런 세력 균형이 매우 파괴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정치적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평시의 긴장과 갈등이 쌓아 올린 적대와 분노의 에너지가 대선 같은 주기적 정치 이벤트를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된다. 대통령 선거는 사회 전체의 갈등적 에너지가 응집되는 열정의 쟁투장이자 각각의 진영이 보유한 전략과 인적 자산, 자금, 조직, 담론, 정책 자원이 총동원되는 합법적이고 제한적인 내전(시민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거가 끝나도 해소되지 않는 이 ‘저강도 내전’은 한국 정치가 도달한, 어떤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곤궁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이를 ‘파국적 균형’이란 말로 개념화했다. “갈등하는 세력들이 파국적인 방식으로 상호 균형 짓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이 파국적인 이유는 균형의 지속이 ‘상호 파괴’로 이어질 공산이 큰 탓이다.

역사를 볼 때 이런 파괴적 교착 상태의 끝은 쿠데타였다. 대표적 주인공이 로마 공화정을 끝장낸 줄리어스 시저와 프랑스 제2 제정의 막을 연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다. 피와 복수를 부르는 반동적 해법이다. 민주당 일각에서 공공연히 언급하는 ‘쿠데타 음모론’은 이런 전례에 비춰본다면 100% 허무맹랑한 헛소리만은 아닌 셈이다.

물론 타협적인 해결책도 상상해볼 수 있다. 프랑스식 ‘동거정부’(코아비타시옹), 또는 1990년 ‘3당 합당’식 정계 개편을 통한 교착 국면의 일시적 해소다. 하지만 ‘양극화’가 정치 엘리트 간 대립을 넘어 국민 일반의 ‘정서적 양극화’로까지 치달은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선 이런 편법의 동원조차 쉽지 않다.

남는 것은 안보 상황과 직결된 외부 충격에 올라타 국면을 전환하거나(행정권력 버전), 정치적 무력감을 감내하며 2년 반 뒤 대선이라는 ‘합법적 내전’이 시작되길 기다리거나(입법권력 버전), 그것도 아니라면 불만에 찬 시민들이 법이 명시한 비상수단을 정치권에 강제하는 것(2016년식 촛불·탄핵동맹의 재건) 정도다. 지금으로선 세가지 선택지가 모두 열려 있으나, ‘윤석열식 국정 스타일’과 ‘시간의 흐름’이란 상수를 고려하면 두번째 선택지의 매력도는 갈수록 반감할 게 분명하다.

다음달 10일이면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대통령 부인의 명품 가방 수수가 촉발한 대중의 분노는 주가조작 연루, 공천·국정 개입 의혹으로까지 번지며 정치적으로 수습이 불가능한 정서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앞에서 대통령의 남은 임기 1년조차 용인하지 않았던 국민들이다. 이대로면 권좌를 지키려는 ‘부부 의지’를 압도할, 분노한 시민의 ‘일반 의지’가 형성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시간이 도래한다면 지금의 ‘파국적 균형’을 빚어낸 한국 정치의 구조적 곤궁을 벗어날 ‘공화국 재편’의 해법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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