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모두가 의사이자 과학자…진료하고 의료기술도 개발” 스위스 발그리스트대병원

취리히(스위스)=이병철 기자 2024. 10. 3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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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골격계 전문 병원에서 첨단의료 산실로
의사와 과학자·공학자 협력 인프라 지원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발그리스트대병원은 의학 교육과 기술 혁신의 중심지다. 근골격계 질환을 전문으로 다루는 발그리스트대병원은 환자 진료뿐 아니라 의사들을 위한 의료기술 개발에도 앞장서고 있다. 증강현실(AR)을 이용한 외과의사 교육부터 로봇공학과 3차원(D) 프린팅으로 의료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검증하기까지 모든 연구가 한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30일(현지 시각) 오전 발그리스트대병원에서 만난 파비오 카를로 OR-X(수술실-X) 연구유닛장은 “미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고성능 컴퓨터 네트워크로 수술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술실 내부에서 이뤄지는 모든 움직임을 디지털화해 연구와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며 “외과 의사에 필요한 교육과 함께 수술 환경에서 필요한 기술을 실험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발그리스트대 병원이 운영하는 의학 교육, 실험 시설 오퍼레이팅룸-X(OR-X) 내부. 실제 수술실과 같은 환경을 갖추고 있으나, 수술대에 환자가 오르지는 않는다. 디지털 기반 의학 교육 시설로, 의료 기술 개발에도 활용 중이다./취리히(스위스)=이병철 기자

발그리스트대병원은 1912년 설립됐다. 설립 초기에는 근골격계 장애를 가진 어린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현재는 인근 취리히대, 취리히 연방공대(ETH) 등과 협력해 첨단 의료기술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발그리스트대는 발그리스트텍이라는 기업을 운영하며 의족과 관절 보조장치를 개발, 판매도 하고 있다. 스타트업 육성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 발그리스트 베텔리궁스AG(BBAG)를 2016년 출범하고 현재까지 분사 기업 9개를 키워내며 스위스 의과학, 의공학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토마스 허글러 발그리스트대병원 이사는 “발그리스트대의 의사는 모두 의사인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하다”며 “현재의 치료법을 뛰어넘는 미래 의학의 발전이 이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발그리스트대 인근의 연구시설인 발그리스트 캠퍼스는 의사들과 협력하는 과학자, 공학자를 위한 공간도 갖추고 있다. 웨어러블(wearable·착용형) 장치를 만드는 바이오공학 연구실, 환자들의 운동 능력을 분석하는 보행 분석실, 자기공명영상(MRI) 장치와 컴퓨터단층촬영(CT) 장치가 마련된 영상센터 등 모두 의공학 기술 개발을 위한 시설로 운영 중이다.

발그리스트대 병원 인근의 실험 시설 발그리스트 캠퍼스 내부의 의료공학실험실. 발그리스트대 의료진이 환자를 진료하면서 필요한 기술은 발그리스트 캠퍼스의 과학자, 공학자와 함께 개발할 수 있다. 이외에도 보행 분석실, 영상 분석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취리히(스위스)=이병철 기자

발그리스트대병원 의사들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미충족 의료 수요를 발굴하고, 기술 개발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과학자들과 협력할 수 있다. 세바스티아노 카프라라 디지털의학유닛장은 “발그리스트대병원은 정형외과, 척수, 바취학, 교정, 류마티스 같은 각 분야에 맞는 연구 그룹이 별도로 구성돼 있다”며 “의사와 과학자, 공학자를 연결해주는 연락 담당자도 별도로 준비돼 있다”고 설명했다.

의사들이 기술 개발에 필요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자체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카를로 유닛장은 “과학, 공학 지식을 쌓고 싶은 의사들을 위해 단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며 “공학, 인공지능(AI), 컴퓨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모두 다루고 있다”고 소개했다.

새로운 의료기술 개발을 위한 탄탄한 인프라(기반 시설)도 장점이다. 실제 환자를 수술하면서 얻는 모든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하는 클라우드(가상서버)가 대표적이다. 발그리스트대병원은 엔비디아의 후원을 받아 첨단 클라우드 시스템을 구축해 의료기술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카프라라 유닛장은 “가령 환자의 근골격계를 3D 디지털 자료로 만들고, 3D 프린팅 기술로 필요한 수술 도구를 개발하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자연어처리(NLP) 기반의 AI(인공지능) 모델로 주변 병원과 진단 기록을 표준화해 코호트(동일 집단)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스위스 발그리스트대 병원 오퍼레이팅룸-X(OR-X)는 수많은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운영 중이다. 이 곳에서 개발된 기술은 다시 사업화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다./취리히(스위스)=이병철 기자

첨단 의료 교육이 이뤄지는 OR-X은 지난해 처음 개소해 발그리스트대병원을 대표하는 시설로 자리 잡았다. OR-X는 실제 수술실과 같은 시설이 마련돼 있지만, 환자는 받지 않는다. 대신 디지털 데이터로 만들어진 가상의 환자가 수술대 위에 오른다. 새로운 수술법을 숙달하는 것은 물론, 발그리스트대 병원 연구진이 개발한 신기술도 적용해볼 수 있다. 현재까지 OR-X에서 훈련을 받은 의사는 458명에 달하며, 기술 개발을 위한 사업은 91건이 진행됐다.

기술 개발과 시설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대부분 기업의 후원과 연구자들의 사용료로 충당한다. 직접 개발한 기술을 사업화해 수익을 내고 재투자도 이뤄진다. 카를로 유닛장은 “발그리스트대병원의 모든 시설은 개방형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대신 스타트업이나 기존 기업과 협력해 신기술 사업화를 지원해 기술이 연구실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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