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을 때 강한, 진보당의 ‘확장 딜레마’
“재보궐 전문정당에 당했다.”
전남 영광 재선거에서 진보당이 ‘이변’을 일으키며 조국혁신당을 제치자, 한 혁신당 관계자가 29일 진보당을 일러 한 말입니다. 전국에서 모인 진보당 당원들은 영광 재선거를 ‘이재명-조국-진보당의 3파전’으로 만들더니 결국 진보당을 2위로 올려놨습니다. 혁신당 관계자는 “진보당 당원들이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주민들에게 손인사를 하는데, 어정쩡했던 주민들의 첫날 표정이 한 달 후 웃는 얼굴로 바뀌더라”고 전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 그대로지요.
저 역시 선거 취재를 위해 영광을 찾았던 지난 12일 오전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영광 터미널로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6명의 각 당 선거 운동원을 마주쳤는데요. 앉은 채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운동원은 무소속 후보의 캠프 소속이었고, 웃는 얼굴로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운동원들은 5명 모두 진보당 소속이었습니다. 나흘 뒤 선거결과를 그대로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이번 영광 재선거에서 진보당은 200명 안팎의 당원이 장기연차 등을 내고 영광에 상주했습니다. 주말에는 더 많았습니다. 최소 500명에서 1000명의 당원들이 영광으로 결집해 무보수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새벽 6시부터 저녁 10시가 넘는 시각까지 영광 곳곳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풀을 뽑고, 농촌 일손을 도왔습니다. “고생한 거 봐서라도 찍어주려고 한다”는 영광 군민들의 반응은 그저 입에 발린 말은 아니었던 겁니다.
진보당의 이런 강점은 재보궐선거에서 극대화됩니다. 진보당은 지난해 4월5일에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치러진 전북 전주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민주당이 후보를 안 낸 까닭도 있지만, 진보당 특유의 ‘바닥 훑기’ 선거운동에 다른 후보 캠프의 운동원들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평일엔 100∼200명, 주말엔 1000명이 넘는 당원들이 전주 전역을 훑으며 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손·발톱을 깎으며 말벗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진보당의 한 의원은 2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진보당이 지역에서 생활밀착형 정치를 계속해오고 있지만 당세가 약하다 보니까 지역 전체로 확대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며 “재보궐 선거는 진보당 역량을 총 집중할 수 있고, 실제 많은 당원이 와서 진심으로 활동을 하니 주민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진보당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근거로 10만 당원의 열정을 꼽습니다. 전체 10만 당원에서 7만명 정도는 노동자 당원이고, 노동자 당원의 80% 정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인데, 이들은 진보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홍성규 당 대변인은 “진보당은 정치가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정당이지 배지(국회의원)로부터 시작된 정당이 아니다. 혁신당은 배지 12개가 공중에 떠 있는 정당이고, 진보당은 배지가 3개지만 진보당이 절실한 당원들로 뭉친 ‘단단한 정당’”이라고 자평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진보당은 국회의원 하나 없던 시절에도 생활 밀착형 의제에 집중해 지방의회에서 성과를 내곤 했습니다. 그 힘으로 2022년 6월 전국 지방선거 때는 국회의원 한명 없던 진보당이 기초단체장 1명,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17명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냈습니다. 이후 재보궐 선거에서 1명의 광역의원과 1명의 기초의원이 추가돼 현재는 지방의원이 23명입니다.
당시 진보당은 전남지역에서 농민수당 문제와 ‘농어촌 파괴형 풍력, 태양광’에 반대하는 ‘생활밀착 정치’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농민회나 노동조합, 시민사회 활동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은 활동가들이 광역의회나 기초의회 후보로 나서서 성과를 내는 방식입니다. 이번 영광군수 재선거에 나선 이석하 진보당 후보도 전국농민회총연맹 출신으로 영광에서 평생 지역운동을 해온 인물입니다.
진보당이 풀어야 할 과제도 있습니다. 지역에서 생활밀착 정치로 주목을 받았지만 국회의원 3명으로는 중앙무대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혁신당은 12석으로도 원내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는데, 3석인 진보당은 더 어려운 처지입니다. 정권심판 분위기가 강한 것도 진보당에 유리하지 않습니다. 진보당 한 의원은 “어떤 민생의제를 말해도 ‘김건희 블랙홀’에 빠져서 부각될 수 없는 조건”이라며 “윤석열 정권이 계속되는 이상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아서 고민이 깊다”고 했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만든 총선용 ‘비례위성정당’(더불어민주연합)에 참여한 것을 두고는 비판이 거셌습니다. 비례위성정당 참여를 거부하고 ‘장렬히 산화한’ 정의당의 선택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됐습니다. 진보당은 앞으로 호남지역 총선과 지방선거에선 민주당과 경쟁하고, 대선에선 정권 심판을 위해 민주당과 연대하는 전술을 구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민족주의 계열 진보 분파에 굳어진 정치문법입니다.
‘진보당의 딜레마’도 존재합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당세를) 수축하면 성공하는데, 확장하면 실패하는 흐름이 반복된다”고 말했습니다. 지역으로 들어가 민생에 집중하면 좋은 반응을 얻지만, 덩치가 커진 상태로 중앙에서 남북문제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질문을 받게 되는 흐름이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홍 대변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일 수 있는 게 분단, 통일, 북한에 대한 입장”이라며 “입장을 확인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라 특정 세력을 억압·탄압하는 기재로 종종 활용된다”고 했습니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과 관련한 질문에는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전쟁에 대해서도 저희는 반대한다”며 “파병이 당연히 옳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윤석열 정부가 마치 세계평화의 파수꾼이라도 된 것처럼 저렇게 흥분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진보당은 30일 창당 7주년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진보당의 ‘가능성’은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기민도 기자 ke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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