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는 NO,, 협력은 OK…브릭스, 새 질서의 시작? 러시아 고립 시도는 실패했다
러시아 카잔에서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제16차 브릭스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공정한 세계 발전과 안정을 위한 다자주의 강화”라는 기치로 36개국 지도자가 모였고, 그중 22개국은 정상이 직접 참석했다. 현재 브릭스의 정식 회원국은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란, 이집트, 에티오피아, UAE의 9개 나라다. (5개국에서 9개국으로 바뀌면서 브릭스는 브릭스+가 되었지만, 편의상 브릭스로 통칭한다)
브릭스 국가들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44%를 차지한다. 세계 GDP(구매력 기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기준으로 36.8%.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기준으로 42.4%. 앞으로 브릭스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의 특별한 참가자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부가 반발했지만 유엔 사무총장은 카잔에 갔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출국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마흐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도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해서 가자지구 휴전, 인도적 접근 보장, 이스라엘군의 신속한 철수에 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실행을 촉구했다. 또 아바스 수반은 팔레스타인도 브릭스 가입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가 꼽은 “눈에 띄는 손님 한 명”은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나토 회원국이자 미국의 군사기지가 있는 나라인 튀르키예가 브릭스에도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주목할 일이다. 정상회의에서 에르도안은 다극화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브릭스가 “공정한 세계 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러시아는 30개가 넘는 국가가 브릭스 가입 의사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의에서 브릭스는 회원국 확대 없이 13개 국가와 ‘파트너’ 선언을 했다.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벨라루스, 볼리비아, 알제리, 우간다,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쿠바, 태국, 튀르키예가 브릭스 파트너국이 되었다.
아세안 국가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이 이번에 나란히 브릭스 파트너국이 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특히 비동맹 노선을 견지해온 인도네시아가 브릭스의 정식 회원국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발표한 사실이 주목된다. 세계 질서에 어떤 비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정상회의를 마무리하며 브릭스는 <카잔 정상회의 선언>을 채택했다. 정상회의의 결과와 러시아가 의장국이었던 지난 1년간의 성과가 요약된 선언문이다. 선언문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정세, 일방적 경제제재 반대, 국제금융시스템 개혁, 브릭스 곡물거래소 창설, 국경간 결제 시스템, 브릭스 예탁결제기관 등의 내용이 담겼다. 특히 “불법적인 제재를 포함한 법 외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조치가 세계 경제와 국제 무역, 지속가능한 발전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고 선언했다.
이번 정상회의의 성과로 언론에 가장 많이 보도된 것은 브릭스 곡물거래소 창설이다. 곡물거래소는 지난 7월 브릭스 국가들의 농업장관이 모였을 때부터 논의된 사안으로서, 이번 정상회의에서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브릭스 곡물거래소가 부당한 외부 간섭, 투기, 인위적인 식량난 조성 시도로부터 각국의 시장을 보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처음에는 곡물거래소로 시작해서 향후 다른 상품도 거래하는 시장으로 확대할 가능성을 거론했다.
한국 언론은 브릭스 정상회의를 어떻게 보도했을까? 대부분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설에 관한 푸틴의 반응에만 집중했다. 정상회의 자체의 내용과 결과는 보도하지 않거나, 일부만 보도했다. <서울경제>는 ‘결제시스템 구축 못한 브릭스, 곡물거래소는 창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 <한국경제>는 러시아가 브릭스 클리어라는 통합 예탁결제 시스템을 제안했지만 “대부분의 브릭스 국가들은 서방과의 관계를 의식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카잔 선언문에는 ‘브릭스 은행’이라 불리는 신개발은행(NDB)을 21세기의 새로운 다자주의 개발은행으로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립적인 국경간 예탁결제 시스템인 브릭스 클리어(BRICS Clear) 도입을 검토하고 논의하기로 했다는 내용도 있다. 또한 선언문은 브릭스 조건부준비금협정(BRICS CRA)이 단기적 국제수지 압력에 대응하고 금융 안정성을 높이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라고 명시했다. 금융시장 인프라 연결이나 공동의 결제 시스템 구축과 같은 문제는 “논의” 중이며 “자율적인 토대” 위에서 추구해 나간다고 되어 있다. 브릭스 플러스(BRICS+)와 파트너라는 형태로 외연 확장을 우선 하고, 현지화 사용이나 탈달러 의제는 회원국들의 동의를 바탕으로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대안적 결제 시스템에 대해 브릭스 회원국들 사이에 온도차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달러의 대안을 찾는 데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이번 정상회의 기간에 푸틴 대통령은 대안적 결제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러나 서구와의 대결을 추구한다거나 서구의 시스템을 대체하겠다는 표현은 없었다. 그는 “달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달러의 무기화가 문제”라고 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달러 거래를 막았으므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도 했다. 앞으로도 브릭스는 회원국들 사이에 합의되는 선에서 사업을 추진할 것이고, 남은 과제는 다음 의장국인 브라질로 넘어간다.
이번 정상회의에 대한 서구 언론의 평가는 다양하지만,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에는 대체로 합의한다. BBC는 푸틴이 “서구의 압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브릭스 정상회의를 개최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공영방송 NPR은 “모든 사진촬영, 모든 양자회담, 모든 악수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모스크바를 고립시키려는 서구의 시도가 실패했다는 증거로 보였다”는 표현을 썼다. 미국의 <악시오스>도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구의 수많은 제재와 비난이 쏟아졌지만, 주요 정상들과 함께한 정상회의에서 푸틴은 세계적 왕따로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유로뉴스>는 브릭스의 경제 규모가 유럽연합(EU) 경제 규모의 2.5배에 달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번에 확대된 브릭스 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에 “유럽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로이터>는 러시아가 브릭스 곡물거래소 창설을 제안했지만 거래소가 실제로 문을 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푸틴이 “무기화된 달러의 대안”을 제시했지만 다른 브릭스 국가들은 열정적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브릭스 내부의 긴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브릭스를 서구와 대결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주요국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NPR은 “푸틴의 비전에 동의하는 나라들도 많겠지만 모든 나라가 러시아처럼 불만이 많지는 않다”고 해석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푸틴의 달러 문제가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면서 “문제는 손님들이 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했다. 이번 정상회의 주최측이 참가자들에게 미국 달러화나 유로화를 현금으로 가져오라고 안내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비자카드와 마스터카드가 러시아 내 영업을 중단했기 때문에, 이번 정상회의 참가자들은 달러나 유로화 현금을 러시아 은행에서 루블화로 바꿔서 사용해야 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브릭스가 탈달러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달러에 의존하는 모순을 짚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러시아가 만든 상황은 아니다. 서구의 대러시아 경제제재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다국적 금융그룹 ING는 중립적인 태도로 브릭스와 달러의 미래를 분석한 결과를 지난 23일 공개했다. ING에 따르면 브릭스가 세계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탈달러화에 유리한 조건이다. 또한 원유 무역이 탈달러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국제 무역에서 브릭스 국가들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으며 지난 몇 년간 SWIFT를 통한 결제에서 브릭스 주요국 화폐의 비중이 커지긴 했지만, 달러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정도는 못 된다. 따라서 달러는 당분간 지배적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ING는 전망했다. 또 브릭스 회원국들이 현지화 사용이라는 방법으로 달러에서 벗어난다거나 공동 화폐를 창설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로이터>는 23일자로 팀 오닐과의 독점 인터뷰를 실었다. 팀 오닐은 전직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로서 2001년 BRIC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해서 ‘미스터 브릭스’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과 인도가 협력하지 못하는 한 브릭스가 미국 달러에 도전한다는 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그는 미국과 유럽을 빼고 세계의 여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브릭스 정상회의는 “러시아, 중국 같은 중요한 신흥국들이 1년에 한 번 모이는 상징적인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오닐의 인터뷰가 공개된 23일에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인도의 모디 총리가 양자회담을 열고 4년간의 국경 분쟁을 해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서구가 브릭스 내의 분열 요인으로 거론했던 중국과 인도의 관계가 회복되려 한다는 것이다. 서구가 긴장할 차례다. <VOA>는 중국과 인도가 다시 가까워지면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도 의문이 던져진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호주, 인도와 함께 쿼드(QUAD)를 결성했는데 인도가 계속 쿼드에 충실할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브릭스 정상회의에 관한 영미권의 외신 보도를 주로 살펴봤다. 브릭스 정상회의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다는 시각도 있고, 새로운 세계 질서의 시작이라는 시각도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시각은 대체로 후자 쪽이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서방이 주도하는 이른바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공정하지 못하며 자국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측면만 생각해도 브릭스에 대한 신흥국들의 관심은 충분히 이해된다. 유럽은 쇠퇴하고 있으며, 미국은 공장이든 일자리든 다 자국으로 끌어오기를 원한다. 유럽도 미국도 신흥국들의 경제 발전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당선이 유력하다는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트럼프는 한국을 “현금 인출기”라 부른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듯하다. 달러 패권은 당분간 유지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변화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서구적인 시각에 치우쳐 있는 한국 언론, 미국과 일본만 바라보는 외교‧통상 정책, 정말 괜찮을까?
[안진이 더불어삶 대표(livewitha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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