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는 싸움닭?… 정부 방침 따른 것도 제재

권순완 기자 2024. 10. 30.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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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정부 부처들과 엇박자 잦아
그래픽=백형선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가 경쟁 당국인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판매 장려금(통신사가 판매·대리점에 주는 보조금) 담합’ 혐의로 많게는 5조원대 과징금을 물 위기에 처했다. 통신 3사는 통신 분야 주무 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의 지도에 따른 것이라며 반발했고 방통위도 “담합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냈지만, 공정위는 사건을 법원 1심 격인 공정위 전원회의에 회부했다. 통신 3사는 “정부 말을 잘 들은 것이 ‘죄’가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관(官)을 신뢰하느냐”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과거에도 CD(양도성예금증서) 금리 담합, 오리고기 담합, 해상 운임 담합 혐의로 은행, 오리 농장, 해운사 제재를 추진했지만, 패소하거나 불발에 그쳤다. 모두 금융위원회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의 ‘교통정리’를 거쳐 금리나 가격을 결정한 경우였다. 기업들이 길게는 4년 동안 공정위 조사 등을 받으며 ‘담합 업체’라는 꼬리표를 달고 눈총을 받다가 무혐의로 결론 나는 일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공정위가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에만 집착해서 싸움닭처럼 다른 정부 부처들과 엇박자를 내고 갈등을 보이면서 “공정위를 둘러싼 정부 내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백형선

◇통신 3사 “방통위 말 들었다”

29일 통신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4월 ‘통신 3사가 2015~2022년 판매 장려금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서로 담합했다’는 내용의 심사 보고서(검찰 공소장 격)를 통신 3사에 보냈다. 작년 2월 공정위가 관련 조사에 착수하자 통신 3사는 “방통위가 과열 경쟁 방지를 위해 통신사들의 판매 장려금 규모를 제한하는 등의 행정적 지도를 한 결과”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통신사들이 방통위 지시 범위를 넘어서까지 담합했다”며 조사를 강행했다. 급기야 지난 2월 방통위가 “지시 범위 안에서 이뤄진 일이라 담합이 아니다”라고 거들었지만, 공정위는 두 달 뒤 사건을 전원회의에 넘겼다. 통신 3사는 지난달에도 “통신사들은 방통위의 합법적 지시를 준수했을 뿐이고, 통신 시장의 경쟁을 해친 적이 없다” 등 내용의 의견서를 공정위에 보내는 등 반발했지만, 공정위는 내년 초 전원회의를 열고 사건을 심사할 예정이다. 심사 보고서에 적힌 관련 매출액을 감안할 때 최대 5조5000억원의 역대급 과징금이 가능하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작년 통신 3사 영업이익 합계(약 4조4000억원)를 넘어서는 규모다.

그래픽=백형선

◇해수부·금융위 의견도 무시

공정위가 산업 담당 부처의 의견이나 행정지도 사실을 무시하고 기업들의 가격 결정 행위를 담합으로 밀어붙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에도 공정위는 국내외 해운사 20여 곳이 한국~동남아 노선 운임을 담합했다는 혐의에 대해 과징금 962억원을 부과했다. 해수부는 조사 과정에서 “해운 공동 행위는 고객인 화주들에게 이익이 된다. 특수성이 있다”고 반대했지만 공정위는 강행했다. 하지만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은 대만 국적 선사 에버그린이 제기한 불복 소송에서 “공정위 과징금을 취소하라”고 판결, 해운사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다른 해운사에 대한 과징금도 줄줄이 취소될 예정이다.

공정위와 금융위원회의 대표적인 엇박자 사례로 남은 CD 금리 담합 조사는 무려 4년 넘게 이어졌지만 무혐의로 끝난 경우다. 2012년 공정위는 6대 은행이 대출 금리의 기준이 되는 CD 금리를 담합했다며 조사에 나섰다. 당시 금융위원장까지 나서 “담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공정위는 2016년 사건을 증거불충분으로 심의 종결했다.

◇美는 담당 부처 의견 우선

산업 담당 부처의 의견을 무시한 경쟁 당국의 무리한 조사·제재가 반복되는 것은 향후 2·3심에서 패소해도 담당자가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반면 기업들은 불복 소송에서 이겨도 ‘담합 기업’이라는 이미지 훼손에 오랜 기간 시달려야 한다. 정재훈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찰의 경우엔 재판에서 패소하면 인사 고과에 치명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확실한 경우에만 기소를 하는데, 공정위는 그런 페널티가 없다”며 “수년 뒤 공정위가 패소해도 담당 직원들은 이미 승진하고 그 자리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미국은 경쟁 당국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한국의 방통위 격인 연방통신위원회(FCC) 등의 의견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고 한다. 일본 경쟁 당국인 공정취인위원회는 ‘정부 부처의 이런 지시는 담합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지침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놔 정부 간 의견 충돌을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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