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재미 다 잡은 부여에서의 사흘[폴 카버 한국 블로그]
그런데 이번 여름엔 두 아이와 부모님까지 영국에서 오시는 바람에 내가 잠시나마 시끄러운 이웃에 등극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드는 일은 너무나 유쾌한 일이긴 하였으나, 일 패턴이 들쑥날쑥해지고 일에 집중하는 시간도 줄어들어서 마감이 가까워지면 잠시 나 혼자만의 사무실에서 잠깐 일하다가 다시 가족들과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기도 했다. 그래도 가족들이 영국으로 떠나버리고 다시 덩그러니 혼자 집에 남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쓸쓸함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이 떠나 혼자 남겨졌다는 우울함보다는 왠지 여행을 다녀온 뒤 마주하는 평범한 외로움을 대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 일할 거리를 잔뜩 가방에 싸서는 단기 워케이션(Workcation·출장 겸 휴가)을 다녀오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한국은 이런 워케이션을 홍보하는 지자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자체 차원에서는 관광 수입을 얻을 수 있고 관광객 입장에서는 일도 하고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양쪽 다 윈윈이며 좋은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나는 백제의 수도 부여로 행선지를 정했다. 부여는 그 깊은 역사 덕분에 고궁이나 박물관 등 갈 데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오고 가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부여군에서는 이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는데, 주중 숙박을 하는 경우 큰 할인율을 적용해 준다든지, 관광지 부근에 사무실로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마치 예술인 마을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었다. 부여에 머물던 3일 동안 나는 금강을 따라 나 있는 자전거 도로를 질주하기도 하고 유명한 관광지에 들르거나, 마치 196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오래되고 구불거리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보기도 했고, 시장에서 지역 토산품과 기념품들을 사면서 열심히 놀러 다녔는데 관광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내가 잔뜩 싸 들고 온 일도 거의 마무리할 수 있어서 3일을 부여에서 정말 알차게 보내고 온 것 같다.
워케이션보다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이 우리 귀에 더 친숙한 개념인데,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신종 직업군을 뜻한다.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도 올해부터 디지털 유목민 비자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 오래된 나로서는 워케이션이라는 개념을 이미 꽤 오랫동안 실천해 온 것 같아 이 개념이 그렇게 생소하진 않다. 전자 산업으로 점점 사회가 재편되면서 나와 같은 부류의 직업 종사자들이 점점 많이 늘어나는 추세라 이런 프로그램이 점점 보편화하면 인구소멸 문제에 직면한 한국의 많은 지자체들도 세수 부족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뿐더러 외로움, 쓸쓸함으로 인한 우울증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나도 부여에서 3일 동안 놀면서 일하는 경험을 통해 일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뿌듯함이 들었다.
더 욕심을 내자면 2, 3일 동안 짧게 시간을 내서 급하게 돌아오는 단기 워케이션보다는 한 달 이상 장기 체류하면서 일주일에 3, 4일 일하고 나머지 3, 4일은 신나게 놀다 올 수 있는 장기 워케이션이 가능하다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렇게 되면 날씨 같은 변수로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좀 더 느긋하게 일하고 관광도 해 워케이션의 취지가 좀 더 잘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 보시기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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