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동자 ‘부신암’, 첫 산재 인정
반도체 노동자에게 발생한 희귀암인 부신암이 처음으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윤성진 판사는 지난 23일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A씨는 2000년 11월부터 하이닉스 청주공장(현 키파운드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반도체 웨이퍼 제조 세부공정 중 하나인 증착(박막) 공정 장비 유지·보수를 맡았다. 그는 해당 공정 장비·설비에 유해물질인 액체가스를 투입하거나 직접 냄새를 맡아 가스 누출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또 설비 세정을 위해 부품을 불산(HF) 수조에 담갔다가 빼고 각종 유기용제로 설비를 닦는 작업도 했다. A씨 근무 공간인 클린룸은 반도체 제조 과정 중 발생한 유해물질이 곧바로 클린룸 외부로 배출되지 못하는 구조로 돼 있다.
A씨는 37세이던 2020년 3월 부신암 진단을 받은 뒤 이듬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업무 중 노출된 각종 물질과 부신암 간 연관성을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A씨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부신암이 A씨가 취급한 유해물질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점이 의학적·과학적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A씨가 취급한 유해물질 종류가 매우 많고, 유해물질이 노출되는 환경에서 장기간 근무한 후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빠른 시기에 부신암에 걸리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부신암의 다른 원인이 될 만한 유전자 변이나 가족력도 없는 데다 부신암과 유해물질이 무관하다는 점 역시도 의학적·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된 것이 아니라면 부신암과 유해물질 간 상당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A씨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를 통해 “근로복지공단이 진작 제대로 판정했으면 소송까지 힘들게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근로복지공단은 장벽을 낮춰야 한다. 현장 다른 동료들도 산재로 의심되는 병이 있지만 높은 인정 문턱으로 신청하는 걸 어려워한다”고 밝혔다.
A씨를 대리한 법률사무소 지담 임자운 변호사는 “첨단산업 발전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규명되지 않은 위험에 계속 노출되면서 다양한 건강문제를 겪는다. 이번 판결은 그러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보상하며 산업발전을 장려하는 것이 산재보험제도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70만원짜리 임야, 건설업자가 111배 넘는 3억원에 산 까닭
- “윤석열 대통령에게 훈장 안 받겠다”…교수에 이어 초등학교 교사도 거부
- [스경X이슈] ‘흑백요리사’ 출연진, 연이은 사생활 폭로…빚투→여성편력까지
- “장학사 만들어줄게”…여교사 성추행·스토킹한 교장 법정구속
- 아파트서 후진하던 쓰레기 수거 차량에 쾅…7세 초등학생 한낮 참변
- ‘파우치 논란’ 박장범 선배들도 나섰다···“염치를 안다면 멈출 때”
- 버스 시위 중 체포된 전장연 대표···법원 “국가가 1000만원 배상하라”
- 이재명 만난 윤여준 “민주주의 훈련 덜된 분들이 권력 잡아 문제”
- 어도어, 민희진 대표이사 선임안 부결···민희진 “주주 간 계약 효력은 여전해”
- ‘손자 사망’ 급발진 의심 사고 할머니 재수사에서도 ‘혐의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