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무죄, 무죄 “알아야 할 진실이 너무 많다”
… 유가족협의회 ‘희생자 159명 참사 당일 동선’ 등 9개 항목 진상규명 요청
임현주(58)씨가 눈을 뜬다. 아침 7시다. 침대에서 일어나 큰아들 방으로 향한다. 불이 꺼진 방에서 아들이 이불을 덮고 깊이 자고 있다.
“의진아.”
현주씨는 전등을 켜고 아들 이름을 부른다. 의로울 의, 참 진 자로 지은 이름이다. 정이 많고 반듯한 아들. 현주씨가 이불을 걷자 미소를 띤 의진씨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의진아.”
의진씨는 말이 없다.
현주씨는 침대에 누워 있던 액자 사진을 품에 끌어안고 기도한다. “의진아. 오늘도 열심히 같이 살아보자. 너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너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속히 오도록, 오늘도 그 일을 위해 같이 나가자.”
아들 없는 세상이 여전히 낯설다
현주씨는 아침마다 의진씨 방에 가서 기도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태원 참사로 의진(당시 29)씨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다 돼간다. 가족과의 산행을 좋아했고, 생선회와 돼지갈비, 과일을 좋아했고, 특히 딸기로 만든 요구르트와 음료를 좋아한 ‘스트로베리남’ 의진씨.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며 ‘훌륭한 최고경영자(CEO)’를 꿈꿨던 의진씨. 큰아들이 없는 세상이 현주씨는 지금도 낯설기만 하다.
이태원 참사 2주기(10월29일)를 약 일주일 앞둔 2024년 10월21일. 희생자 가족들이 모이기로 한 날이다. 현주씨는 차를 몰고 이태원역 1번 출구로 향했다. 2022년 10월29일 밤 10시15분, 158명이 죽고 312명이 다치는 압사 참사가 벌어진 현장이다. 참사 현장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참사 트라우마로 생을 마감한 희생자까지 더해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총 159명이다.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탄천을 지나 한강변에 있는 도로에 진입했다. 아들과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현주씨는 의진씨와 함께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탔다. 엄마가 탄 전기자전거가 방전돼 움직이지 않을 땐 “난 걸어가면 돼”라며 본인이 타던 자전거를 엄마에게 내주고, 즉석 라면 조리기로 끓이는 ‘한강 라면’을 먹고 싶다던 엄마 소원을 들어준 따뜻한 아들이었다.
이태원역 주변엔 주차할 곳이 마땅찮았다.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용산구청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용산구청. 박희영씨가 지금도 구청장으로 재직하는 곳이다. 착잡했다. 현주씨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를 상징하는 보라색 점퍼를 입고 차에서 내려 주차장 밖으로 나갔다.
박희영 구청장은 참사 발생일에 핼러윈을 맞아 이태원 일대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예상됐음에도 위험 방지 대책을 세우지 않아 158명 사망을 초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런데 법원은 2024년 9월30일 박 구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박 구청장이 사전 대책 마련 단계에서부터 참사 발생 이후 단계에 이르기까지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고 재난 발생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은 용산구청과 같은 지방자치단체를 재난 예방·대비·대응과 복구 활동을 하는 재난관리책임기관으로 규정한다. 법원은 그러나 참사 발생 당시 재난안전법이 다중 운집으로 인한 압사 사고를 재난 유형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므로, 박 구청장에게 핼러윈에 대비한 별도의 안전관리계획을 세울 구체적·직접적인 업무상 주의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중 운집 인파사고’를 사회재난 유형에 명시한 재난안전법 개정안이 시행된 건 2024년 7월이 돼서다.
현주씨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알던 상식과 너무 달랐다. “법에 규정이 없어서 재난을 예방할 의무가 없다니요. 너무 기가 막혀요. (2022년 4월18일부터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됐기 때문에 전보다 많은 인원이 몰릴 걸 알았을 거 아니에요. 거기에 대비를 안 했는데 무죄라니요. 그러면 누구 잘못인 거예요?”
“이 골목에 서면 그날의 아비규환이 생생”
참사 발생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김광호씨다. 서울경찰청장으로서 서울 지역 질서와 안전을 유지할 책임이 있음에도, 참사 발생 당일 이태원역 주변에 적절한 경찰력 배치 등 필요한 조처를 다 하지 않아 158명을 사망, 312명을 상해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그에게 적용된 혐의다. 참사 당일 이태원 현장에 배치된 경찰관은 총 137명. 이 중 수사경찰이 50명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질서 유지와 시민 안전 확보를 위한 경비기동대는 한 명도 없었다. 당시 경찰 활동 초점은 군중 분산보다 마약, 성폭력, 폭행 등 범죄 예방·단속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법원은 김광호 전 청장에게 보고된 정보만으로는 그가 ‘2022년 10월28~30일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집중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 나아가 참사 발생 위험성을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 죄가 없다고 봤다. 참사를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그에 따른 업무상 과실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결국 1심 재판 단계에서 참사 부실 대응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관리자급 공무원은 이임재 전 서울 용산경찰서장(금고 3년) 정도다. “김광호 (전 청장) 판결선고일(2024년 10월17일)에 경찰기동대(버스)가 5대 와 있었어요, 법원 앞에. 참사 현장엔 없던 기동대가. 누굴 지키러 온 거죠? 김 (전) 청장? 아니면 (희생자) 가족들이 다칠까봐? (김 전 청장이) 그때(참사 때) 지시했어야죠. 기동대 투입했어야죠. 안 그럴 거면 그 사람은 그 자리(서울경찰청장)에 왜 있던 건가요?”
오후 2시가 됐다. 현주씨를 포함한 희생자 가족 20여 명이 참사가 발생한 길이 약 40m, 평균 폭 4m(전면부 하단 폭 5.5m, 후면부 상단 폭 3.2m) 골목을 등지고 취재진 앞에 섰다. 희생자 이주영씨 아버지인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운을 뗐다.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2년이 됐지만, 이 골목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이 골목을 찾아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아픈 이유는, 이 골목에 서면 그날의 아비규환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정민 위원장이 말을 이어갈수록, 정면을 응시하던 현주씨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25분간 진행된 기자회견이 끝났다. 현주씨는 보라색 바탕의 포스터를 골목 한쪽 벽에 붙였다. 포스터엔 ‘9대 과제’가 적혀 있었다. 유가족협의회가 2024년 10월2일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한 9개 과제다. △희생자들이 가족들에게 인계되기까지 그 과정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이 참사 대응에 미친 영향 △참사 당일 현장 배치된 경찰 운용의 문제점 △참사 당일 구급활동 및 대응의 문제점 △각 정부기관의 참사 전날·당일 위험신고 대응 및 전파의 적절성 등을 철저히 조사해줄 것을 특조위에 당부했다. 특조위는 2024년 5월2일이 돼서야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안(특별법)을 근거로 9월 출범했다.
“내 딸이 어떻게 떠났는지 알아야지 않겠나”
김남희(50)씨는 참사 발생 뒤 100일까지 아무 활동도 하지 못했다. 할 경황이 없었다. 딸 신애진(당시 24)씨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니던 직장에 휴직을 신청했다 . 연말연시를 한국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 2022년 12월엔 딸과 함께 여행 갔던 타이 치앙마이에 머물렀다. 대학 때 사진동아리 활동을 할 만큼 사진을 좋아했고, 한때 사진작가가 꿈이었던 애진씨. 남희씨는 딸이 남긴 사진을 보며 걸었다. 길을 걷다 주저앉아 우는 일이 많았다.
남희씨를 일으켜 세운 건 한 장의 서류였다. 2023년 1월 유가족 단체대화방을 통해 구급활동일지의 존재를 알았다. 119구급대원이 현장 출동시각과 환자 접촉시간, 병원 도착시간, 환자 증상, 환자 인적 사항 등을 적는 문서다.
“그전까진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감정이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그랬는데 그 서류를 알게 되고 ‘엄마로서 애진이의 마지막 기록은 반드시 찾아야겠다’ ‘부모로서 내 아이가 어떻게 떠났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애진이 엄마인데’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남희씨 목소리가 떨렸다.
남희씨는 딸의 구급활동일지를 얻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애썼다. 처음엔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몰라 용산소방서에 전화했다. ‘소방청에서 총괄하기 때문에 답변할 게 없다’는 말을 들었다. 소방청에 전화했다.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연결이 안 됐다. 유가족 요청사항을 취합하고 지원하기 위해 행정안전부가 꾸린 이태원 참사 지원단에 연락했다. 일주일 뒤에 지원단에서 연락이 왔다. ‘소방청에서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구급활동일지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한다.’
“지원단이 소방청에 공문 보내서 일 처리하고 소방청 답변을 그대로 읊을 거였다면, 차라리 제가 소방청에 하루 종일 전화해서 같은 설명을 듣는 게 나았겠죠. 안 된다는 답변 받으려고 일주일씩 기다리며 전화한 건 아니니까. 지원단이 유가족을 돕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정부가 보여주기식으로 꾸린 조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결국 어렵게 구급활동일지를 구한 남희씨. 하지만 애진씨가 사망한 상태로 참사 현장 인근에 있는 순천향대병원에서 경기도에 있는 안양샘병원으로 이송된 정보만 알 수 있었다. 애진씨가 언제, 어떤 상태로 참사 현장에서 순천향대병원으로 이송됐는지를 알 수 있는 구급일지는 결국 지금까지 구하지 못했다.
희생자 159명 참사 당일 동선 여전히 답답
많은 가족이 이 점을 답답해한다. 왜 내 자녀가 이태원과 거리가 먼 안양샘병원으로, 강동성심병원으로, 동국대 일산병원으로 이송됐는지 가족들은 참사 발생 2년이 지나도록 정부로부터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 희생자가 서울·경기 지역에 있는 50개 이상의 병원 영안실로 흩어지면서 가족들은 희생자 장례를 위해 먼 지역까지 방문해야 했다. 가족들이 특조위에 ‘희생자 159명의 참사 당일 동선과 발견 경위, 발견 직후 취해진 응급조치 내용, 희생자 이송 과정에서의 시간대별 지휘체계, 주요사항 결정 주체 등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요청한 이유다. 지금까지의 수사와 재판, 국회 국정조사에서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 중 하나다.
참사 발생 전 인파 밀집 사실과 압사 우려를 알리는 11건의 112신고가 있었고, 용산구청 당직실 근무자는 참사 당일 저녁 8시40분께 ‘이태원 인도에 사람이 많아 복잡하다’는 내용의 민원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경찰은 인파 관리를 하지 않았고, 박희영 구청장과 그의 비서실장은 직원들에게 대통령실 인근 집회 현장으로 가서 전단 수거를 지시했다.
신고와 민원을 제때 처리만 했어도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남희씨는 생각한다. 알고 싶었다. 왜 재난 대응이 제대로 안 됐을까. 2023년 1월부터 4월까지 용산구, 용산서, 서울시, 경찰청 등 여러 기관을 상대로 민원을 넣고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참사 당일 용산구 안전재난과는 무슨 일을 했는지, 용산서 경비과는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청 당직실은 어떻게 운영됐는지, 당직실에서 몇 명이 근무했는지, 책임 있는 구청 공무원과 경찰관을 상대로 용산구와 경찰청이 자체 감사나 감찰 계획이 있는지…. 엑셀 파일로 정리한 요청 항목만 50개가 넘었다.
남희씨는 각 기관의 무성의한 답변과 정보 비공개 통지에 맞서며 전화를 매일 붙들고 살았다. 그러면서 들은 가장 황당한 답변은 이것이다. “우리도 모르니까 신문기사 보세요!”
남희씨가 이런 일을 겪는 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1월30일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추모, 유가족 및 피해자 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법률안은 오히려 피해 구제에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하고 피해자 적기 지원을 저해할 수 있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경찰청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가 수사 결과를 발표한 2023년 1월13일 이후에도,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서부지검이 2022년 12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인명 피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기소한 이후에도, 정부는 유가족을 대상으로 참사에 관한 어떤 브리핑도 하지 않았다.
유가족 대상 브리핑한 적 없는 정부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게 진상규명인데, 가족들이 가진 여러 의문점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피해자를 위해 무슨 최선을 다했는지 묻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국가의 진심을 정말 모르겠습니다.”
남희씨는 컵에 있는 물을 들이켜며 말을 이어갔다. “참사 직후(2022년 12월) 녹사평역 근처에 분향소가 설치됐을 때 보수 유튜버들이 몰려와서 매일 해를 끼쳤어요. ‘놀러 가서 죽었는데 왜 정부를 비판하냐’고. 희생자와 가족들이 살을 에는 슬픔 속에서 이런 비난을 받을 때, 정부는 뭘 했나요? 묵인하고 방조했잖아요.”
이태원 참사 발생 100일을 하루 앞둔 2023년 2월4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한쪽에 분향소가 설치됐다. 한 달 뒤인 3월10일 서울시청 앞 서울도서관에 ‘서해 수호의 날’(3월24일)을 기념하는 대형 펼침막이 걸렸다. 그러면서 ‘나라 구하다 죽었냐’는 비난의 화살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가족을 향해 날아왔다.
남희씨 남편이자 애진씨 아버지인 신정섭(54)씨도 그 공격을 맨몸으로 맞은 당사자다. “자꾸 서해 수호 용사들이랑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비교하는데요. 서해 수호 용사들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들이잖아요. 국가는 당연히 그분들을 잘 모셔야죠. 그런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그분들이 지키려 한 국민이잖아요. 서해 수호 용사와 비교해야 할 대상은 참사를 막기 위해 할 일을 하지 않은 공무원들이죠, 희생자가 아니라.” 참사 재발 방지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희생자 가족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잊히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가 우리 사회에 ‘피해자’로만 남는 일이다. ‘피해자’라는 말로는 친구들과 매운 라면 먹는 걸 좋아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돼줄 거라 믿은 친구가 주변에 많았고, 설치류 친칠라를 닮아 별명이 ‘신칠라’였고, 가족과의 여행을 즐겼고, 투자 대상 기업을 발굴해 성장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청년, ‘언덕 위의 보배’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애진씨를 담을 수가 없다. 의진씨도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 가족들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2023년 책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에 이어 2024년 출간된 책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는 희생자 가족 25명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참사로 세상을 떠난 가족의 삶을 기록하고,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은 가족들은 오늘도 각자의 위치에서 불의에 맞서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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