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는 아무나 하나 [서아람의 변호사 외전]

2024. 10. 2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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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워크숍 일방적 요리대회
화합 내세워 강행해선 안 돼
직장 내 괴롭힘 처벌될 수 있어
주말 행사 자체가 위법될 수도

온 나라가 ‘흑백요리사’ 열풍으로 뜨겁습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요리 대결 TV 프로그램입니다. 덕분에 인터넷에는 눈가리개를 하고 시식하는 흉내를 내는 영상들이 넘쳐나고, 편의점에서는 흑백요리사 디저트가 날개 돋친 듯 팔리며, 흑백요리사에 출연했던 셰프들의 식당은 내년까지 전부 예약이 마감되는 등 그야말로 미친 인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 제 조카도 “오늘 불고기는 이븐하게 익지 않았네요.”, “대파의 익힘이 타이트해요.” 같은 멘트를 따라 해서 유행에 뒤처진 어른들을 벙찌게 만들곤 하는데요. 명품, 슈퍼카, 펜트하우스, 팔로어를 자랑하는 셀럽들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 불 앞에서 땀 흘리며 묵묵히 일하는 직업인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 21.5%라는 역대급 폐업률을 기록하며 곡소리만 가득하던 외식 시장에 모처럼 활기가 돌게 된 것도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요리 계급 전쟁의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흑백요리사에 꽂힌 중소기업 대표’라는 흥미로운 게시물이 하나 올라와 화제가 되었는데요. 어느 사원이 자기 회사의 워크숍 공지문을 캡처해서 올린 겁니다. ‘1일 차 금요일 12시 회사 출발, 13시 휴게소에서 중식, 식대는 6500원 주면서 휴게소에서 알아서 먹으라고 함, 15시 초빙강사 사내 교육, 20시 이후 자유시간, 2일 차 토요일 10시 산책 및 워크숍 돌아보기, 11시 체크아웃’ 등 직장인에게는 일분 일초가 황금같이 소중한 토요일을 야금야금 갉아먹게 짜놓은 일정도 화가 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끈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1일 차 18시30분 요리 경연(메뉴 선정, 재료 준비, 조리). 팀당 5~6명 구성, 인당 5만원 지원, 3팀 시상(대상 30만원)’. 사내 워크숍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는 대신 요리대회를 열어 팀별로 음식을 만들고 그걸로 저녁 식사를 대체한다는 공지에, 신랄한 댓글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사장 답정너네.”, “눈 가리고 캡사이신 넣어라”, “라면이나 끓여줘.”, “주최자가 센스 있다는 소리 듣고 싶었던 것 같은데 실패한 워크숍”, “단체 식중독 걸리겠네” 등등.

흑백요리사가 인기를 끌면서 요리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 이때, 회사 워크숍에서 의미도 재미도 없는 형식적인 활동을 하는 대신, 함께 요리하고 또 그걸 나눠 먹으면서 건전하게 경쟁하고 화합을 다진다. 취지 자체는 좋습니다. 그러나 회사든 학교든 공공기관이든, 조직의 관리자는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재밌다고 해서 남들도 다 재밌는 건 아니다.”라는 걸 말입니다. 평일 내내 격무와 야근에 시달린 직장인들은 할 줄도 모르는 칼질에 베이고 켤 줄도 모르는 버너에 데어가며 한 끼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걸 회사 사람들 전체가 지켜보고, 심지어 심사하고 순위까지 매긴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시키는 일만 하는 것도 벅찬데 요리까지 잘해야 하나, 하는 반발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상을 받지 못하거나 요리에 실패한 팀원들은 맛없는 저녁을 꾸역꾸역 먹으며 여기 왜 왔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제시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취업규칙 표준안’에서는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업무상 필요성이 없는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행사에서 원치 않는 직원들에게 특정 복장을 하게 하거나 장기자랑을 하게 하거나, 그 연습을 하게 하는 것도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것입니다. 일부 회사에서는 ‘팀 빌딩’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법원 판례는 업무상 명백히 불필요한 것 외에, ‘일견 업무 범위 내로 보이지만 업무상 합리성이 없거나 동떨어진 정도의 행위’ 또한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근로자는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청에서는 해당 사안을 조사한 후 필요하다면 시정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서아람 변호사
이뿐만 아니라, 주말에 워크숍을 하는 행위 자체가 법령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대기업의 주말 워크숍 강요는 매년 한 번씩 터져나올 만큼 흔한 관행인데요. 작년에는 모 제약사 임원이 ‘워크숍 불참자는 연말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주겠다, 주말 육아는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것을 권한다’는 취지로 보낸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근로기준법 제7조는 ‘사용자는 폭행, 협박, 감금, 그 밖에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하는 수단으로 근로자에게 근로를 강요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로자가 원치 않는다면 인사고과 반영 등으로 이를 사실상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직장 내 괴롭힘일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 위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로자가 휴무일인 토요일이나 주휴일인 일요일에 근무하게 된다면, 회사는 시간에 따른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해야만 합니다. 워크숍은 근무가 아니라고요? 쉬고 놀고 재충전하는 거라고요? 글쎄요, 대한민국 직장인 중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합니다.

회사원은 중세시대 집사마냥 회사를 위해 24시간 대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장님이 흑백요리사 놀이를 하고 싶으시다면 혼자 하시면 됩니다. 제발, 죄 없는 근로자들은 내버려두시고요. 주말에 부르지도 마십시오. 상사가 사주는 투뿔 한우보다, 집에서 끓여 먹는 컵라면이 더 ‘이븐하게’ 맛있는 법입니다.

서아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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