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합병 촉박했던 것 아니냐"는 재판부의 질문...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삼성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4. 10. 29.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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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사견(思見)]
(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부정거래 행위·시세조종) 등 항소심 2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4.10.28/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회장 취임 2주년을 하루 넘긴 28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어김없이 2주만에 열리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재판을 위해 서울고등법원 제417호 대법정에 섰다.

이날 재판에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목적과 위법성에 대해 다퉜다. 검찰은 삼성 미래전략실 주도 아래 이재용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목적을 숨기고, 합병시너지를 과장해 무리한 합병을 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피고인 측은 이미 1심에서 배척된 공소사실을 검찰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검찰의 주장과 달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미래전략실과 양사가 협의해 합병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방은 일부 공소사실 변경내용이 있긴 했지만 지난 3년 5개월 동안 진행된 1심 내용의 도돌이표와 같은 것으로 보였다.

검찰과 변호인 양측의 공방보다는 오히려 이 재판을 주재하는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의 진행방식이 더 눈길을 끌었다. 재판부는 양측의 공방에서 궁금한 점을 적극적으로 질의해 현장에서 의문점을 해소해나가는 방식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이날도 백강진 부장판사는 오후 2시부터 4시간 가량 진행된 3차 공판 마무리 질문을 통해 피고인들의 법률대리인에게 "한달의 합병결정 기간이 너무 짧은 기간이 아닌지"를 물었다.

백 부장판사는 "4월 23일에 합병을 추진하기로 하고, 4월말 합병 TF가 구성되고 이사회가 5월 26일에 열렸는데 통상적인 회사의 합병을 이런 일정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어 "촉박하게 합병을 결정해 시너지효과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미전실과 양사가 협의해서 한 것이고 전단적이 아니라면 합병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한달의 짧은 시간에 합병을 검토하고 이사회를 통해 통과시킨 것은 미래전략실이 미리 정한 후 지시한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재판부의 이같은 질문은 상식선에서 타당해 보인다. 두 회사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렇게 빠르게 합병을 결정하는 게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피고인 측 법률대리인은 "검토 추진기간이 짧았던 것은 맞다"면서도 "삼성 그룹 계열간의 합병이라는 특수한 점이 있다"고 답했다. 구체적인 것은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말을 맺었다.

사실 삼성이라는 기업을 접하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는 삼성그룹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문제다. 두 개의 상이한 회사가 합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삼성 계열사간 합병은 다르다. 삼성의 시스템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그룹내 계열사끼리가 아닌 다른 그룹과의 합병과는 크게 다르다.

또 각 회사를 맡은 CEO들도 서로 너무 잘 안다. 윤주화 제일모직 사장은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사장을 지냈고,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은 삼성전자 프린팅사업부장을 맡았다. GE 출신인 최 사장은 삼성SDI, 삼성카드 사장도 지냈다. 사장들끼리 순환근무하는 식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매주 수요일 사장단 회의를 통해 서로 만나서 의견을 나누는 시스템이었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촉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삼성의 시스템에서는 충분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일반인들 눈에는 '비상식적인 일'인데 삼성에선 '상식적인 일'은 많다. 국정농단 수사 때도 '상식'의 문제로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조사를 받았던 'A 사장'에게 "회사 내에서 넘버3가 수백억원을 외부로 지원하는 상황을 모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기업에는 회장, 부회장, 사장이 있으니 조사받는 사장을 '넘버3' 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게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당시 삼성전자에는 이건희 회장 외에 부회장이 4명, 사장은 20명쯤 있었던 시절이다. 한 회사에 사장이 20명쯤 있는 것은 일반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또 사장이 수백억원이 움직이는 걸 몰랐다는 건 비상식적이지만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부장(사장)이 전결로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이 3000억원 정도였다. 이는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0.1%에 불과한 금액으로 '수백억원' 정도의 집행사항을 모를 수도 있는 게 삼성 내부의 상식이다.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이 지시하면 김종중 전 전략팀장이 군말없이 따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법정에선 기업인들의 답변이 상식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한달만에 합병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게 우리의 상식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 대한민국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큰 기업이 탄생한 것이 상식적인가? 선뜻 답하기 힘들다. 상식을 벗어난 기적에 가깝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토 아인슈타인은 "상식은 18살때까지 후천적으로 얻은 편견의 집합체다"라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글로벌 전쟁을 벌이는 기업에서는 분초를 다투며 일어난다.

한편 백 부장판사는 공판 시작 전에는 검찰 측에 이날 변론과정에서 "어느 행위에 '부정한' 점이 있는지 명확히 해달라"고 주문했고, 변론이 끝난 후 "이재용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할 목적을 숨기고 가장한 것이 부정한 행위인지"를 재차 물었다.

또 "계획만으로 처벌이 가능한지, 또 이미 시장에 알려졌는데 승계 계획을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지" 등을 물었고 검찰은 "경영권 승계 목적이 있었으면 이를 공개했다면 그 나름대로 평가를 받았겠지만 이를 숨기고 합병을 통한 기업가치 제고만을 강조한 것이 부정행위"라고 주장해 공방을 이어갔다. 다음 4차 공판은 내달 11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계약 이후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다툴 예정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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