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22년간 지킨 ‘만장일치 합의’ 폐기
진정 안건들, 전원위 상정 등 충분한 논의 없이 폐기될 우려
국가인권위원회가 3명으로 운영되던 소위원회를 ‘4인 체제’로 바꾸고, 소위에서 위원 3명 이상이 찬성하지 않으면 진정 사건을 기각할 수 있게 규정을 바꿨다. 인권위가 출범 이후 22년간 유지해오던 ‘만장일치 합의’ 표결 관행을 바꾼 것이다. 이로써 소위에서 위원 1명만 반대해도 진정 안건을 기각 또는 각하할 수 있게 됐다. 진정 사건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폐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권위는 28일 제20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소위원회에서 의견불일치일 때의 처리’ 안건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 안건은 14차례 재상정된 끝에 처리됐다. 표결은 위원들 간 공방을 거쳐 회의 개최 3시간 만에 이뤄졌다. 표결 안건은 ‘소위에서 표결 시 의결정족수(3명)를 충족하지 못하면 부결 선언과 함께 배척 선언을 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과 ‘각 소위 위원을 4명으로 구성하는 내용’이었다.
첫번째 안건은 찬성 6명(김용원·이충상·강정혜·김종민·이한별·한석훈 위원), 반대 4명(남규선·김용직·소라미·원민경 위원)으로 통과됐다. 안창호 위원장은 기권했다. 두번째 안건 역시 찬성 8명(안 위원장, 김용원·이충상·강정혜·김종민·이한별·한석훈·김용직 위원), 반대 3명(남규선·소라미·원민경 위원)으로 통과됐다.
이로써 인권위는 소위 위원을 기존 3명에서 4명으로 늘리게 됐다. 의결정족수는 소위 위원 3명 이상이 됐다.
인권위법 제13조 2항은 3명으로 구성된 소위에서 3명 이상 출석과 3명 이상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돼있다. 인권위는 2001년 출범 이후 22년간 소위에서 위원 3명의 의견이 만장일치가 안되면 안건을 재논의하거나 전원위원회에 상정했다. 이날 통과된 안건이 명시적으로는 ‘3명’이라는 의결정족수를 유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소위를 4명으로 늘림으로써 ‘과반 의결정족수’를 만든 꼼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9월 김용원 상임위원은 인권위 침해구제제1위원회에서 정의기억연대가 ‘수요시위를 혐오단체로부터 보호해달라’는 취지로 낸 진정에 대해 ‘기각의견’ 2명, ‘인용의견’ 1명으로 갈라지자 진정을 기각했다. 이에 정의연은 소위의 판단이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7월 김 위원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인권위가 항소를 포기하면서 판결은 확정됐다.
원민경 상임위원은 지난 인권위 소위인 군인권보호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은 김용원 상임위원이 전원합의를 거치지 않은 채 기각 결정을 내린 일을 거론하며 우려를 표했다. 원 상임위원은 “당시 소위원장과 다른 위원이 기각의견을 냈고, 이에 대해 저와 군인권보호위원회 직원들은 계속 논의할 것을 제안했지만 김 상임위원은 이를 종결시켰다”고 말했다. 원 상임위원은 “이렇게 의결이 이뤄진다면 사건 진정인의 인권을 더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남규선 상임위원은 “인권위는 김 상임위원이 자동기각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전원합의로) 일을 처리해왔다”며 “그런데 1년여 만에 이렇게 논란이 됐고, 이 결정은 김 상임위원이 했던 위법한 결정에 대한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일부 위원들은 소위를 4명으로 구성하는 2항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소라미 비상임위원은 “4명으로 증원할 경우 3명의 출석만으로도 소위원회 개최가 가능하게 되면 내실 있는 운영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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